2. 조선의 최고 수출품, 그 말을 키운 전남

 

 

 

2. 조선의 최고 수출품, 그 말을 키운 전남
말(馬)조공으로 나라를 키웠던 조선, 그 말을 키워낸 전남

부산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목장지도. 숙종 4년(1678)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전국 목장에 대한 관리체제와 상태를 살필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1권 42면으로 돼 있다. 첫 장에 진헌마정색도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현재 서울 광진구 화양동과 살곶이 일대에 있었던 사복시 목장을 그린 것이다. 채색 필사본으로 돼 있어 회화사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제 1595-2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의 최고 수출 품목이었던 말

조선시대 최고·최대 수출품은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말’(馬)이다. 조선은 해마다 평균 1천여 마리의 말을 중국으로 보냈다. 한 해에 1만여 마리의 말을 보낼 때도 있었다. 명나라는 말이 많이 필요했다. 땅덩어리가 넓어 군사가 많으니 말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에 말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조선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른 바 ‘조공’(朝貢)이다.

조선이 세워진 1392년부터 1428년까지 36년 동안 명나라에 조공품으로 보내진 말은 5만9천여 마리에 달한다. 명나라에 보내지는 말을 진헌마(進獻馬)라 했다. 말을 보내는 대가로 비단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은 말 1마리 원가에 10배를 더해 말 값을 받아냈다.

맨 처음, 조선에서는 커다란 말이 생산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여진족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때 큰 말을 달라고 했다. 그들은 말을 받은 대신 종이를 줬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편에 보면 조선은 여진족들에게 큰말 상품(上品)을 면포(綿布) 45필(疋), 중품(中品)은 40필, 하품(下品)은 35필어치 가격에 결제했다.

그런데 조선은 명에 조공할 때 말 값 가격으로 큰말 상품은 500필, 중품은 450필, 하품은 400필을 받았다. 여진족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개무역으로 10배 정도 시세차익을 본 것이다. 조공은 조선이 외화를 벌면서 또 명나라의 신학문과 신문물을 배우고 들여오는 수단이었다. 조공은 조선이 훨씬 이익을 보는 국제무역이었다.

■어디서, 누가 그 많은 말들을 키웠을까?

조선 조정은 ‘조선 해안가 곳곳에 말 목장(牧場)을 짓고 말을 키웠다. 목장의 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53개, <동국여지승람>에 87개, <대동여지도>에 114개, <증보문헌비고>에 209개가 전해진다.

전남 지역은 목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우선 좋은 말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제주도에서 가까웠다. 그리고 따뜻한 날씨 탓에 풀이 잘 자랐다. 섬은 말을 해치는 호랑이나 승냥이와 같은 맹수들이 접근하기가 힘들어 말을 풀어 키우기가 좋았다. 또 전라도 해안가나 섬은 한양으로 가는 뱃길이 발달돼 있어 키운 말을 실어가기도 편리했다.

■진도일대의 목장

진도문화원은 1년 여의 작업을 거쳐 2017년 2월 20일, 조선시대 문헌인 <목장색등록>(牧場色謄錄)을 한글로 번역해 출간했다. <목장색등록>은 1834년(순조 34)부터 1873년(고종 10) 사이 사복시가 전국 각 목장의 조세수납, 양마 등과 관련된 공문·기록 등을 담아둔 책이다.

조선 초기 제주도에서 온 말들은 진도 첨찰산과 현재의 해남군 화원면 소재지 일대에 있었던 말 목장 속장(황원목장)에 분산돼 키워진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부터는 진도 지산면 관마리의 말 목장으로 통합 관리됐다. 진도 지력산 일대에 있었던 목장은 당초 임회면에 속해 있었으나 사람이 늘자 목장면으로 바뀌었고 나중에 지산면이 됐다.

관마리(觀馬里) 역시 ‘말을 보살핀다’는 뜻이다. 관마리는 지력산 자락과 부엉이봉, 큰망뫼봉 등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낮은 산지여서 풀이 많다. 근처에는 관마천이 흐르고 있어 말들이 먹을 물도 풍부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 관마리에서 진도지역의 거의 모든 말들이 키워진 것으로 보인다. 관마리에서는 연간 800마리에서 최고 1천440마리의 말이 길러졌다.

■여수일대의 목장

김병호선생이 정리해놓은 <여수의 목장>글에 따르면 조선시대 여수지역의 목장은 순천부의 곡화목장(曲華牧場)과 흥양현(고흥)의 도양목장(道陽牧場)이다. 곡화목장의 다른 이름이 백야곶 목장(白也串牧場)으로 조선의 대표적인 목장이었다.

백야곶목장은 지금의 화양면 전체에 걸쳐 있었던 목장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는 순천도호부 관할아래 백야곶·돌산도·묘도 등 세 곳에 목장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백야곶 목장은 1629년(인조7)에 순천부 곡화목(曲華牧)으로 분리됐다.

곡화목장은 소호리 해안에서 오천리 해안까지 돌을 성처럼 쌓아 목장으로 삼은 곳이다. 이곳에서 길렀던 말은 1천7마리였다. 말을 키우던 목자는 446명이었다. 목자들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으나 병역에서 제외되는 특전이 주어져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앞 다퉈 목자로 들어왔다.

곡화목장의 여러 시설들과 감목관이 살던 집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모두 불타버렸다. 목장 흔적이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후 행정명칭을 정할 때 예전에 이곳이 곡화목장터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화양(華陽)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곡화목장의 흔적은 화양면 일대 지명과 화양고등학교 앞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감목관 칭송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수지역 향토사를 20여년 넘게 연구·조사하고 있는 박종길씨(여수지역사회연구소 지역사문화위원회 위원장)는 화양고가 있는 화동리는 ‘곡화목장의 동쪽’이라는 뜻에서 화동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설명했다.

■무안일대의 목장

조선 시대 감목관이 임명된 목장은 5개소였다. 규모가 컸던 국영목장 5개소는 무안의 망운목장, 고흥의 나로도 목장, 여수의 곡화목장, 진도의 지력산목장, 제주의 제주목장이었다. 무안 망운목장은 세 곳의 속장을 두고 있었다. 자은목장, 장산목장, 압해목장으로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모두 신안에 있다.

망운목장은 조선시대에 영광군에 속해 있었다. 인조 때 감목관이 설치됨에 따라 영광군 감목면이 됐고 자연 영광군수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목장면은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무안군으로 편입됐다.

망운면 소재지인 ‘목동마을’ 이름은 감목관이 살고 있었던 ‘목관(牧館)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망운면사무소 앞 목동공원에는 7개의 ‘망운목장감목관선정비’가 있다. 가장 빨리 세워진 선정비는 1743년에 제작된 것이고 나머지는 180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목동공원에는 또 수백 년이 넘은 느티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망운 토박이인 윤덕중씨는 “목동리 앞에는 과거 압창포라는 포구가 있었다”며 “바닷가가 있어 목장에서 키운 말들을 실어내기에 아주 편리했을 것”이라 말했다. 백창석 무안문화원장은 “아주 옛날에는 망운면사무소 앞으로 ‘구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구렁’이 말들을 이동시키는 ‘말 통로’가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무안 망운면사무소 앞의 감목관 선정비
망운면사무소 앞 목동공원에는 7개의 ‘망운목장감목관선정비’가 있다. 가장 빨리 세워진 선정비는 1743년 제작된 것이고 나머지는 180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목동공원에는 또 수백 년이 넘은 팽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망운면 소재지인 ‘목동마을’ 이름은 감목관이 살고 있었던 ‘목관(牧館)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망운면사무소 옆의 목장터
망운면사무소 주변에 남아있는 수십 그루의 큰 나무들은 목장의 방책 구실을 했다. 성안에 있는 마을을 목내라 했는데 목내사람들은 목외사람들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목외사람들은 말을 먹이고 씻고 다루는 목자들이었고 목내 사람들은 감목을 비롯, 군두와 군부 등 목관의 아전들이었다.
무안의 동목장길
현경면 외반1리 반룡마을에서도 ‘말 통로’로 여겨지는 토성(土城)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외반리 지역은 과거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으로 목장지대였다. 나이든 사람들은 매부리에서 동산리 애북 마을 밑 압창포까지 토성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말들이 오가던 길이었던 것이다. 무안군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해 동목장길을 만들었다. 백창석 무안문화원장이 동목장길 이정표를 올려다보고 있다.
화양 곡화목장 터에 있는 고인돌
곡화목장의 흔적은 화양면 일대 지명과 화양고등학교 앞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감목관 칭송 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수지역 향토사를 20여년 넘게 연구?조사하고 있는 박종길씨(여수지역사회연구소 지역사문화위원회 위원장)는 화양고가 있는 화동리는 ‘곡화목장의 동쪽’이라는 뜻에서 화동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설명했다.
여수 화양고 앞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선정글
화양 화동리에는 고인돌이 지천이다. 박종길씨는 화양고 주변에만 50여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소개했다. 화양고 앞 고인돌에는 감목관들의 선정을 기리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고인돌에는 빙옥기정(氷玉其政:빙옥같이 투명하게 다스렸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감목관이 정말 너그럽게 아랫사람들을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그런 글을 남겼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헤아리기가 힘들다.
진도문화원이 펴낸 목장색등록
진도문화원은 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목장생등록>중 진도와 관련된 목장부분을 외부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번역을 마쳤다. 진도문화원이 지난 2월에 번역, 출간한 <조선시대 진도목장 관련자료집>은 모두 270쪽 분량이다. 진도군의 (말)목장 역사와 시대상, 목장에서 일하던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여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진도 인지리 감목관 선정비
관마리에서는 연간 800마리에서 최고 1천440마리의 말이 길러졌다. 큰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관마리 일대에 있었던 말목장의 흔적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관마리 인근 마을인 인지리에 감목관 송덕비 6개가 세워져 있다. 또 관마리 인근 산에는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쌓여진 돌담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진도 박주언 제공
망운목장 노거
목동감목관선정비
목동공원앞 선정비와 노거수
감목관터 화양초등학교
백야도목장
화양고 앞 박종길씨
진도-관마리 마장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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