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한말 하와이로 떠난 목포사람들
美선교사 영향받은 목포 처녀 신세계 찾아 하와이로
도전정신 넘쳤던 정인수와 최사라

1902년 121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가는 첫 이민선에 승선했다. 이 사진은 인천 내리교회 신자들이 이민선에 오르기 전 기념촬영한 것이다. 첫 이민선에는 내리교회 신자 50명이 승선했다.

17세 소년 정인수 121명 통역 맡아 이민자들 이끌고 미국행

하와이 첫 사진신부 최사라 강인한 의지와 생활력 갖춘 여성

구한말 조선을 떠나 하와이에 정착한 조상들 중에는 눈에 띄는 두 명의 목포사람이 있다. 한사람은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던 121명의 조선 이민자들의 통역을 맡았던 정인수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했다. 다른 한 사람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조선남자들이 장가를 가기위해 고국으로 보낸 사진만을 보고 결혼을 결심, 조선여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와이로 건너간 23세의 최사라였다.

17살에 불과했던 정인수가 어떤 연유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목포출신인 그가 어떻게 해서 인천의 이민자들과 인연이 닿아서 그들의 통역자로 일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대해 밝혀진 것이라고는 목포출신이며, 영어에 능통했고, 17살의 기혼 남자였다는 것이 전부다.

또 목포출신의 최사라는 조선최초의 사진신부(寫眞新婦)였다. 최사라의 신랑은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을 지낸 38살의 노총각 이내수였다. 그녀는 하와이에 도착해 가정을 이루는 한편 하와이의 조선여인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한인이민사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목포출신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출신지가 목포라는 것을 입증하는 공식문서는 없다.

작가 조정래 역시 그의 소설 <아리랑>에서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를 전남 목포출신으로 그리고 있다. 조정래는 <아리랑>에서 하와이 조선이민노동자와 사진신부들의 삶을 그렸다. 조정래 작가는 최사라를 강인한 생활력을 지녔으며 가족을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하와이 조선여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정인수, 최사라 이 두 사람의 경우에서 보듯 구한말 시대 목포사람들은 대단히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다. 17살의 남자가 미국이민선의 통역이었고, 23살의 처녀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기로 결심하고 혈혈단신 미지의 땅 하와이로 떠났다는 사실은 목포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지역이었으며 목포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와이섬에 도착한 사진신부들.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던 조선처녀들은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들이 보내준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심한 뒤 부모와 고향을 떠나 하와이로 왔다. 이들을 사진신부라 부른다. 사진신부들은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가정을 꾸리고 조선부녀회를 조직해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목포항의 개항

1897년 7월 4일 고종이 내린 목포항 개항칙령

1897년 고종 황제는 칙령을 내려 목포를 개항한다. 목포항이 개항되자 미국과 영국, 러시아, 일본 영사들이 앞 다퉈 목포로 몰려와 이권을 확보하는데 애썼다. 이때 목포에 들어와 적극적으로 선교하던 이가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유진벨선교사이다. 유진벨 선교사는 1895년 4월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환자들을 돌보고,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고종의 침실에서 불침번을 서는 등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

 

유진벨 선교사

그 뒤 1897년 목포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목포진료소(1898)와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등을 세웠다. 유진벨 등 미국선교사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명과 미국이라는 신세계는 조선신분사회에서의 탈출을 노리는 하층민과 직업군인들, 신세계를 동경하던 어린 여자들에게 꿈을 안겨주었다.

이들은 때마침 고종이 주한미국공사(駐韓美國公使) 알렌의 부탁을 받아 이민업무를 관장하는 수민원(綏民院)을 설치하고 하와이 이민자들을 모으자 이민행렬에 끼어들었다. 목포출신의 17세 소년 정인수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1897년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유진벨 선교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사라 역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들의 하와이 이민 배경
1894년의 경우 하와이에는 1만3천명의 일본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는 전체 노동자 수의 5분의 3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은 수시로 집단 태업(怠業)을 벌였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골치를 아프게 하자 하와이 농장주들은 또 다른 해외노동인력을 물색했는데 마침내 찾아낸 것이 조선인들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주한미국공사 알렌을 접촉했다. 알렌은 고종(高宗)을 설득해 백성들의 해외이민을 승낙토록 했다. 에 따라 1902년 8월 20일 수민원(綏民院)이 설치됐다. 수민원은 서울과 부산(釜山), 인천(仁川), 원산(元山)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같은 이민 희망자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유교사상에 젖어있던 조선인들은 부모·형제와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떠나는 것을 죄악시했다.

이민희망자들이 거의 없자 데쉴러는 알렌을 통해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한국명, 조원시: George. Heber Jones)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존스목사는 하와이에서는 더 자유스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해질 것이라고 신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교인 50명이 이민을 떠나겠다고 나섰다. 인천항 부두노동자 20여명과 배를 타는데 익숙한 강화도와 교동사람들도 이민대열에 합류했다.

 

이민선 겔릭호. 일본화물선 겐카이마루를 타고 나가사키에 도착한 조선인 이민자들은 겔릭호를 바꿔타고 하와이로 향했다.

마침내 1902년 12월 22일 모두 121명으로 구성된 조선인 최초의 이민단이 일본 화물선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일본에서 신체검사를 받아 101명이 나가사키(長崎)에서 미국 상선 S.S.겔릭(Gaelic)를 갈아탔다. 이들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게 된다.

상륙 직전, 선상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눈병을 앓고 있던 15명은 상륙허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86명의 조선인(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아이 22명)들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상륙했다. 호놀룰루 항을 거쳐 입국한 조선인 이민자 86명은 오아후(Oahu)섬 서북쪽에 있는 모쿠레이아(Mokuleia)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했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인 노동자.

이중에는 광주출신 조정태(45세)와 전주출신 문부근(22세)이 포함돼 있었다. 하와이 농장 곳곳에 조선인 이민자들을 데려다주고 그들을 보살핀 사람이 바로 목포출신 정인수다. 정인수는 데쉴러가 이민업무를 위해 설립한 동서개발회사의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의 유진벨 선교사 주변에서 영어를 배워 이민회사인 동서개발회사에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진벨 선교사. 오른쪽 말위에 탄 사람이 유진벨 선교사이다.

 

전남지역에서 마차를 타고 전도활동을 하던 유진벨 선교사

■하와이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

사진신부 결혼식 장면-안원규와 이정송

초기 한인이민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여자들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남자 열 명에 여자 한명 꼴이었다. 5천300여명의 남자들이 외톨이로 살았다. 힘들게 일을 했어도 남자들은 마음 놓고 쉴 곳이 없었다. 자연히 술에 취하고 노름과 아편에 빠지는 이들이 늘어났다. 싸움도 잦았다. 한밤중에 남의 농장에 들어가 ‘송아지 서리’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농장주들은 한인노동자들이 하와이 현지 여인과 결혼하도록 애썼다. 그러나 그 어떤 노동자도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한인사회에서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했던 ‘사진결혼’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모아졌다. 조선에 있는 여자와 사진을 주고받은 뒤 마음 맞는 여자가 있으면 하와이로 데려와 결혼을 하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사진결혼은 대부분 사기극이었다. 한인 남자들은 말쑥한 양복을 빌려 입고 농장주의 집이나 차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은 사진을 고치거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나이어린 동료들의 사진을 대신 보냈다.

최사라가 결혼을 하기위해 1910년 12월 2일 조선여인으로서는 처음 하와이에 오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마치 자신이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모두들 흥분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최사라와 이내수의 결혼식 주례는 민찬호(閔燦鎬)목사가 맡았다.

1924년 까지 1천여 명의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다. 사진신부 상당수는 영남지역 여자들이었다. 신부들은 사진 속 얼굴이나 편지의 내용과는 달리 노동에 찌들고 가난한 중년남자들이 신랑이라는 사실에 기가 막혔으나 대부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남편과 같이 농장에서 일하거나 세탁일,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돈을 모았다.

조선여인들은 자녀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여러 여성단체들을 결성해 독립기금을 마련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애를 썼다.한인여성들은 1913년 하와이에 건너온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데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해외독립운동 지사들로부터 배격을 받았던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성장해 결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와이 한인여성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 여인들

■커네컷(Kennecott) 銅광산과 411명의 한국인 광부, 그리고 전라도인
 

유타 커네컷 동광산 전경. 이 광산에서 작성한 고용카드에는 조선인광부 광부 411명의 명단이 있었다. 이중에는 전라도에서 온 10여명의 노동자가 포함돼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가운데 운이 좋은 1천여 명이 1905년부터 1915년까지 10년 동안 미국본토로 이주하는데 성공한다. 한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철도공사장 인부나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한인들이 일했던 곳 중의 하나가 미 중서부지역 최대 노천광산인 유타주 커네컷 빙험캐년 동광산이다.

이 광산에서는 1906년부터 채광이 시작됐다. 이 커네컷 광산에서는 46개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광부들을 고용하면서 고용카드(Employment Card)를 작성했는데 최근 10만여장의 고용카드를 유타 대학교 고문서실에 기증했다. 이 고용카드는 노동자들의 각종 신상명세서와 고용·퇴직 일자를 적어둔 것이다.
 

커네컷 광산의 조선인 고용자카드. 출신지가 전라도로 기록돼 있다.

기자는 지난 2000년부터 3년 동안 유타대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유타대 도서관에 보관된 수만 장의 고용카드를 조사했다.이 결과 1909년부터 20년까지 10년 동안 커네컷 광산회사에서 일했던 한인들은 모두 411명이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중 출신지가 ‘전라도(Jullado)’로 적혀 있는 카드는 10여장이었다. 전라도에서 그 머나먼 유타의 광산까지 가서 일했던 전라도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조선인노동자들이 고된 노동뒤에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
조선인노동자들이 일했던 하와이 코하후쿠농장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