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천형(天形)의 섬이면서 사랑의 섬인 소록도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8. 천형(天刑)의 섬이면서 사랑의 섬인 소록도
소록도, 고통과 서러움…그러나 사랑도 그만큼

■소록도의 잔인한 역사

소록도 중앙공원에 있는 구라탑
한센병은 낫는다는 환자들의 염원을 담아 세워졌다.

 

 

소록도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녹동항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은 바다 건너 고흥 녹동항을 바라보면서 자유로운 몸을 동경했다.

소록도의 과거 역사는 잔인했다. 고통이 너무 깊어 들여다보기가 끔찍하다. 소록도는 인간의 흉포함이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지가 드러난 곳이다.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끌려오고, 견디다 못해 섬에서 나가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강제로 단종수술(精管手術)과 낙태수술을 받아야 했던 야만의 역사가 가득했다.

소록도 사람들을 ‘사람들’로 여기지 않았던 멸시와 천시는 불과 20여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계속되던 일이었다. 소록도 한센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아직도 한센인들을 편견과 두려움으로 대하는 이들이 많다. 한센병은 전염되지 않은 병인데도 일반인들은 꺼림칙하게 그들을 대한다.

소록도 야만의 역사는 치유의 대상이다. 과거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소록도의 역사는 그냥 묻혀 지고 있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과거 소록도에서는 나치 유태인 학살보다 더한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의사들에 의해 일본군의 생체실험(마루타)과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강제수용했다. 일본인들은 아픈 이들을 짐승취급했다. 그러면서도 강제노동을 시켰다. 한센인들은 벽돌 굽기와 가마니 짜기, 숯 굽기에 시달렸다. 일제는 소록도 한센 병 환자들을 구타와 감금, 학대로 길들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몽둥이 찜질을 하고 감금 실에 가두었다.

겨울철이면 마룻장 밑에 찬물을 끼얹어 냉기가 솟아오르게끔 했다. 한센인들은 맞아죽고 얼어 죽었다. 전시체제가 시작되면서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자 일제는 소록도 환자들에게 각종 공출을 강요했다. 전쟁터에서 사용할 피자마 기름을 짜고, 군인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줄 토끼 가죽을 생산하는 등 각종 노역에 동원했다.

일제는 사망한 환자들을 마음대로 해부하고 처리했다. 낙태된 아이들의 신체를 알코올 병에 담아 보관하는 일도 허다했다. 갱생원내에 형무소를 설치해 탈출을 시도한 한센 병 환자들을 수감시키기도 했다. 해방정국 어수선한 와중에는 한센 병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84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광복이후 마음 편하게 농사지을 몇 평을 얻고자 죽을힘을 다해 바다를 메우는 일에 힘을 보탰지만 결국은 헛수고였다. 정치인들은 한센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녹동 앞바다 간척지는 한센인들의 피눈물이 스며있는 곳이다. 절규와 몸부림이 배어있는 곳이다. 그런 역사를 알아야 우리는 한센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소록도의 사랑의 역사

한편 소록도는 사랑의 섬이기도 했다. 정작 우리는 편견과 배척으로 한센인들을 대하고 있을 때 외국인 신부와 수녀(간호사)들은 한센인들을 진정으로 보듬고 보살폈다. 소록도에는 4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지난 2005년 귀국한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의 숭고한 인간애가 스며있다.
 

영아원에서의 마리안느 수녀와 반드로겐 신부
아이를 면회시키고 있는 마가레트 간호사
40년 넘게 소록도 환자들을 돌본 오스트리아 간호사 마가레트와 마리안느에 대한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작업이 정부와 전남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소록도에는 최근 매년 4천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한센인을 돕고 있다. 공중보건의로 와서 23년 동안 근무하고 있는 오동찬 소록도병원 의료부장의 삶도 눈에 띤다. 그래서 소록도는 치유 중이다. 야만의 상처를 섬김과 봉사가 싸매고 있다. 그렇지만 한계는 여전하다. 일반인들의 오해와 편견이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록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상처를 준자와 상처를 치유한자들의 발자취를 잘 더듬어야 한다. 그런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상처를 헤아리지 않고, 과거의 역사를 더듬지 않고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기만이고 과장이다.

다행스럽게 최근, 소록도가 인류애가 꽃핀 자랑스러운 장소가 될 기회를 맞고 있다. 소록도에서 평생 한센인을 위해 헌신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에 대한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지자체·종교단체·전국한센인협회 등 은 ‘마리안느-마가렛 노벨평화상 범국민 추천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다.

그렇지만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헌신을 칭송하기 전, 우리가 그보다 먼저 기억해야할 사람이 있다. 바로 광주출신 최흥종목사의 헌신이 자리하고 있다. 최목사는 이 지방 최초의 한국인 목사였으며 독립투사, 한센병 환자의 대부였다. 최목사는 1911년 광주 양림·봉선동에 한국최초의 나환자수용소를 개설하고 환자들을 돌봤다.

최목사의 집념과 정성은 일제의 조선총독부를 움직여 소록도 병원의 시설이 더 커지게끔 했다. 그의 노력으로 여수 애양원의 세워지고 나주 호혜원 등 한센인들의 정착촌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설립기초가 됐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최흥종 목사의 한센인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 잘 몰라서이다.

최목사는 한센인들의 피고름을 짜내며 그들을 보살폈다. 한센병 환자 치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지원과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나주에서 서울까지 ‘눈물의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노벨평화상 후보추천’이라는 이벤트에 매몰돼 한센병 치료에 최선을 다하던 유진벨 등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들과 최흥종 목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소록도 84인 학살사건
 

애한의 추모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소록도 원생들은 자치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인 직원들은 병원운영권을 자신들이 갖기를 원했다. 병원 운영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원했던 의사 중 한명이 거짓정보를 흘려 원생들을 자극했다.

직원들과 원생들은 충돌했다.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했고 원생들 역시 폭력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고흥 치안유지대에 알려 지원을 요청했다.

8월 21일 원생대표 90명은 협상 장소에 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총으로 무장한 치안유지대와 병원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원생들을 무참하게 사살했다. 죽창으로도 찔러죽였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도 구덩이에 묻고 불태워 버렸다.

이 사건으로 한센인 84명이 숨졌다. 이 사건은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이다. 2002년 8월 22일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본관 앞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애한의 추모비'가 건립됐다.

○ 통곡의 오마도 간척사업
 

소록도 원생들의 오마도간척공사장면
해창만 오마도 간척지도제작연도 1969-07-19
오마도간척사업장면

1960년 7월 1일, 국립 소록도 병원이 정식으로 건립됐다. 원장으로 부임해온 조창호 대령은 소록도 인근에 있는 무인도 오마도 일대에 간척사업을 벌였다. 조 원장의 계획은 간척지에 농토를 만들어 한센 인들을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하던 소록도 한센 인들은 조 원장의 설득에 300만평(9백91만7300여m²)의 바다를 메우기로 뜻을 모았다.

고흥군 도양면 봉암 반도와 풍양반도를 잇는 바다를 간척지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1962년 7월 10일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원생들은 바위와 돌을 부어도 부어도, 메워지지 않는 바다를 상대로 악전고투했다. 무더위와 추위 속에서도 하루 종일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했다. 원생들은 2년 동안 바다를 메우는 일에 전력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상당수 고흥주민들이 “XXX들과 같이 살수 없다”며 간척사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흥주민들의 표가 필요했던 S국회의원은 간척사업의 주체를 행정기관으로 바꿔버렸다. 1980년대 오마도 간척지 공사가 끝나고 농지불하가 시작됐지만 소록도 원생들은 단 한평도 땅을 갖지 못했다.

오마도 간척사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청준씨의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이다. 지금도 소록도에는 그 땅을 만든 고령의 한센 인들이 생존해 있다. 그들은 그 땅을 한이 맺힌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공권력이 저지른 횡포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건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어야하는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다.

○비토리 섬 학살사건

1949년, 경남 삼천포시 인근에 영복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영복원은 소록도와 전남 여수 애양원 등지에서 한센 병이 완치되자 살길을 찾아 모여든 한센 인들의 정착촌이다. 영복원은 삼천포시에서 해안을 끼고 8Km쯤 떨어진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영복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서포 항이 자리하고 있다. 그 곁에는 비토리(飛兎里)라는 섬이 있다. 비토리라는 이름은 섬이 토끼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토리 섬에는 일본사람들이 버리고 간 땅이 있었다. 영복원 한센 인들은 1957년 8월 18일 선발대 30여명을 비토리 섬으로 보내 유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토리 섬과 서포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다. 그들은 지금은 한센인 선발대만 왔지만 나중에 영복원 한센 인들이 모두 건너오면 결국 비토리 섬은 한센인 섬이 돼 버릴 것 아니냐고 한센 인 이주를 반대했다. 비토리 섬 주민들이 한센인 선발대를 습격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영복원의 한센 인 70여명이 응원대로 비토리 섬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개간을 시작한지 10일 째 되던 날, 비토리 섬 주민 300여명과 서포주민 200여명이 몰려왔다.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고 주민들이 한센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한센인들이 몸을 숨긴 천막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도망나온 한센인들은 몽둥이로 때렸다. 이날 한센인 26명이 목숨을 잃었고 53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상자도 20명에 달했다.

■소록도 러브스토리

J씨는 지금 소록도에서 살고 있다. 그는 1946년에 태어났다. 올해 72세다. 그는 지금 건강한 사람이다. 과거에 두 차례 한센 병을 앓았을 뿐이다. 그러나 한센 병을 두 차례 앓았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A郡 출신이다. 어렸을 적 그는 건강했다. 그런데 청년이 되면서 한센 병에 걸린 징조가 보였다. 그래서 그는 소록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어느 날 병이 나았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그를 꺼려했다. 곁에 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는 이방인으로 살았다. 그는 이렇게 살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한센 병을 앓기는 했지만 지금은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다.

J씨는 군 입대를 결심했다. 그래서 병무청에 편지를 써서 군에 입대하고 싶다는 뜻을 알렸다. 얼마 뒤 병무청에서 연락이 왔다.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다른 장정들 틈에 끼어 신검을 치렀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건강한 몸으로 군대에서 3년을 지냈다. 만기제대 후 고향에 돌아갔더니 고향사람들이 그를 받아줬다. 몸이 건강하니까 군대에서도 받아줬겠지~라는 생각이 그를 ‘마을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얼마 뒤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갔다. 힘든 나날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피곤이 쌓였다. 그래서였을까? 한센 병이 재발해버렸다. 소록도를 떠나올 때 잘 쉬고 잘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먹고 살기가 어려워 그 말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소록도로 다시 들어갔다. 한센 병은 완치가 됐지만 다시 사회로 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이십 몇 년을 소록도에서 살았다. 외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그런데 소록도에 자원봉사를 온 어떤 여성과 가깝게 지내게 됐다.

J씨는 55살 되던 해, 자신보다 9살 어린 그 여성과 결혼했다. 한센 병 환자와 그를 보살피던 간호사가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일은 가끔 있었으나 자원봉사자가 한센 병 환자와 결혼하는 것은 J씨가 처음이라 했다.

그들은 소록도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17년 째 소록도에서 살고 있다. 한센 병으로 인해 J씨의 삶은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천형(天刑)이었던 한센 병은 사랑스런 아내를 만나게 해준 기회를 안겨주었다. J씨는 지금 너무도 행복하다.

■소록도, 한센 병 환자들의 수용소가 되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자혜의원

소록도(小鹿島)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섬이다. 원래의 이름은 노루 섬이라는 뜻을 지닌 녹도였다. 섬 모양이 작은 새끼 노루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소록도는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주민들이 어업을 주 생계로 삼는 평범한 섬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16년 소록도에 한센 병 환자 전문 수용시설인 자혜의원을 개설하면서 ‘한센 병 환자들을 가둬 치료하는 섬’으로 전락했다.

한센 병은 예전에는 나병, 혹은 문둥병으로 불러졌다. 1873년 노르웨이의 한센에 의해 나균이 발견되면서 한센 병이라 명명됐다. 한센 병은 아직 정확한 감염경로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치료약이 개발돼 간단한 치료만 받으면 완치된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리면 하늘이 내린 병(天刑)으로 여기고 살던 곳을 떠나와 유랑하면서 지냈다. 구 한말, 호남지역에는 나병(한센 병)환자들이 많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군산과 목포, 광주에 터를 잡고 한센 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자 전국의 한센 병환자들이 호남지역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유진벨 등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호남지역에 의료시설과 학교를 세우면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당시에는 광주 양림·봉선동과 목포 등 곳곳에 한센 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다. 물론 경상도와 강원도 등 전국 곳곳에 한센 병 환자촌이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광주와 부산·대구에 병원을 세우고 한센 병 환자들을 치료했다. 일제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병원설립과 환자치료가 식민지 지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다.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소록도를 나요양소로 선택했다.

일제가 소록도에 한센 병 환자 집단수용시설을 만들게 된 것은 소록도가 지닌 지리적 잇점때문이었다. 소록도는 녹동 항에서 가까워 사람들의 왕래와 물자수송이 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류가 거세 수영으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 일제의 소록도 잔혹사
 

소록도 자혜의원을 시찰중인 일제 우가끼 총독

일제 강점초기 경무 총감부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한센 병 환자 수는 3만6천여 명이었다. 1916년 2월 24일 소록도에 한센 병 환자 전문 수용시설인 자혜의원이 문을 열었다. 자혜의원은 다음해 5월 17일 정원 100명 환자 73명으로 공식 개원했다.

소록도 자혜의원에 수용된 한센인 환자는 1925년에 250명으로 늘어났다. 1933년에 1천명이 넘어섰다. 관리할 직원 수도 늘었다. 자혜의원은 1934년 소록도 갱생원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소록도갱생원은 그 규모가 눈에 띄게 커진다.

일제는 소록도 한센 병 환자들을 구타와 감금, 학대로 길들였다. 특히 소록도갱생원 4대 원장 수호 마사토(周防正季 1933~1942)의 횡포가 심했다. 그는 1933년 원장으로 부임한 뒤 고된 노동을 강요했다.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한 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시 붙잡혀왔다. 이들은 모진 매를 맞은 뒤 감금당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 죽어나갔다. 그러면 일제는 이들 시체를 해부하거나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 광복 후에도 이어진 소록도 잔혹사
 

수탄장 안내문
수탄장 길(현재의 모습)
영아원 면회 장면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의 한센인 환자 수용과 단종·낙태 정책은 계속됐다. 지난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한센인에 가해진 인권 침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광복 이후 1970년 대까지 공권력에 의해 감금과 폭행, 불임수술 등의 인권침해를 당한 한센인 피해자는 6천명이 넘는다.

정부는 1970년대 후반까지 한센 병 환자를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강제로 소록도로 보냈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게끔 했다. 여자 환자가 임신한 경우는 낙태를 시켰다. 이런 인권유린 사실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은 서울대 정근식교수팀이 전국 88개 한센인 정착촌을 방문해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에 정부는 지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국무총리실 산하에 한센인피해사건진상규명위를 설치하고 피해사건 신고·접수 및 피해자 조사를 실시했다. 모두 1만38건의 피해신고가 접수됐으며 현장조사와 심의를 거쳐 6천462건이 사실인 것으로 인정됐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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