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농업 선구자 -⑩구례 최성호>

⑩‘우리밀’ 구례 최성호 영농조합법인 대표

국내 ‘농민운동 1세대’굵직굵직한 캠페인 주도

온갖 풍파 극복 ‘우리밀 살리기 운동’ 한평생 헌신

안전한 먹거리 생산 위해 종자 보존 지켜온 산증인
 

전남 구례군 광의면 최성호 우리밀 가공공장 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생사의 기로에 선 우리밀을 다시 살리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농업인이다. /전남도 제공

‘우리밀’은 쌀에 이어 우리나라 제2의 식량으로 불린다. 과거 쌀·보리가 귀하던 시절 밀은 끼니를 해결해주는 소중한 주식이었다. 지금은 우리밀이 값싼 수입밀에 밀려 외면받는 신세가 됐지만, 우리밀 농가는 꿋꿋이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어 밀을 생산하고 있다.

수입 밀가루 등으로 전멸하다시피 했던 우리밀이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우리밀 살리기’에 헌신한 분들의 노력 덕분이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최성호(75) 우리밀 가공공장 영농조합법인 대표도 생사의 기로에 선 우리밀을 다시 살리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농업인으로 꼽힌다.
 

최성호 대표는 그동안 수입 밀가루로 인해 국내 밀 농업이 초토화된 현실을 정부조차 외면했던 상황을 경계하고, 식량 무기화에 대비하는 철저한 분석과 행동으로 우리밀 종자를 보존하고 지켜온 산증인이기도 하다. /전남도 제공

■14㎏ 종자로 시작한 우리밀 살리기=최 대표는 ‘농민운동 1세대’로 1970년대 초부터 수세폐지운동 등 굵직굵직한 캠페인을 주도하던 농민운동가다. 특히 최 대표는 그동안 수입 밀가루로 인해 국내 밀 농업이 초토화된 현실을 정부조차 외면했던 상황을 경계하고, 식량 무기화에 대비하는 철저한 분석과 행동으로 우리밀 종자를 보존하고 지켜온 산증인이기도 하다.

1세대 농민운동가들이 일선 활동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1989년, 농민운동 모임은 생명운동(무농약), 도시와 농촌의 더불어 살기운동(생협),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3대 의제로 설정했다.

이 가운데 식량작물 중 수입량이 가장 많고 1983년 정부가 수매를 폐지하면서 생산기반이 파괴된 우리밀을 되살리는 행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 근로 노임을 미국산 수입 밀가루로 지급하던 시절이라 밀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1989년 농민회에서 어렵게 우리밀 종자 한 가마를 구입했고 전남도와 전북도, 경남도의 동지들이 14㎏씩 나눠 가졌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최 대표는 고향인 구례군 구만리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밭에 밀 종자를 파종했다. 2년 후인 1991년, 19만8천347㎡(6만평) 규모의 밀 종자를 확보하고 지역 농가들을 설득했다. 40㎏ 포대로 5천여 가마의 수확을 올렸지만 판매가 막막했다. 수입밀에 비해 비싼 우리밀은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적절한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찾는 사람은 없고 가마니 수만 늘어났다. 누군가는 밀 공장을 차려야 했다.

구례지역 50개 농가가 직접 공장을 짓기로 했다. 최 대표가 땅을 기증하고, 농가들이 돈과 일손을 보탰다. 전남도를 설득해 9천만원이라는 거금도 지원받았다. 이렇게 해서 1992년 12월, 370㎡ 규모의 우리밀 가공공장이 세워졌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 제1공장이었다.
 

최성호 대표가 구례 우리밀 가공공장 작업현장을 소개하고 있다. /전남도 제공

■시련 넘어 안전한 먹거리로 자리잡은 우리밀 =곡물 분쇄기로 시작한 공장이 정상궤도에 오르기까지는 무수한 시련과 시행착오가 있었다. 밀 가공에 대한 지식도 없고 원료곡을 확보할 자금도 부족했다. 모든 것이 과제였다. 구례에 이어 전남 무안, 경남 합천 등에 제2·3의 가공공장이 설립됐다.

하지만 1997넌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구례 1공장을 빼고 모두 부도를 맞고 말았다. 구례공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최 대표를 비롯해 우리밀영농법인의 직원과 출자 농가들이 10년 동안 봉급과 배당금을 포기했던 희생의 덕이었다.

공장들이 문을 닫자 우리밀 수매가 줄면서 밀 생산량이 급감해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을 정도로 원료곡 부족을 겪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구례 우리밀가공공장은 백밀가루와 통밀가루 외에도 ‘밀벗’ 브랜드로 2분도 통밀, 국수, 호분건빵, 통밀라면을 비롯해 새싹을 활용한 밀싹국수, 우리밀 차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상품을 내놓은 지 10년만인 2001년에는 영업흑자를 달성했다.

최 대표는 농촌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농촌체험교육관’과 ‘우리 밀밭 풍경 펜션’도 운영해 우리밀 운동의 효과를 더하고 있다.

■차별화된 아이디어 상품 개발 집중 =1999년 전남도 유망중소기업으로 지정받은 우리밀 가공공장은 품질혁신과 안전성 강화를 위해 2003년 ISO(국제표준기구) 9001 품질경영시스템 인증도 받았다. 농민을 위한 최 대표의 열정은 주민들도 인정했다. 제5·6대 전남도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의정 활동 중에도 그는 우리밀 살리기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최 대표는 “소비자들의 우리밀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국제 곡물 가격이 상승하면서 가격에서도 비슷해지고 있다”며 “문제는 대기업이다. 대기업은 우리밀이 죽어갈 때 수입밀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돈을 벌겠다는 목적만으로 우리가 우리밀 시장에 뛰어드는 건 문제다”며 “우리도 대형 수입밀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밀에 대한 인식과 함께 차별화된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하는 데 집중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우리밀 가공공장은 전남·북과 경남지역에서 생산되는 우리밀의 대부분을 수매하고 있다. 연간 약 2천800t(7만 가마)을 수매해 가공한 상품의 판매로 4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최 대표는 “큰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우리밀을 지켜낸다는 데 보람을 느끼며 산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뒤에는 후배들에게 공장 경영도 물려줄 생각이다. 2008년 신지식인 선정, 농림부장관상과 2009년 구례군민의 상, 2010년 대산 농촌문화상 농업발전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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