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친구

어떤 친구

<문상화 광주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젊은 애들처럼 머리를 허옇게 염색을 했어!”

내 모습을 보고 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거, 젊은 친구가 말이 짧네.” 마동석을 패러디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말로 해선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경상도의 한 대학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치고 있다. 9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만난 후 이십년 넘게 알고 지내는 사이로 낙천적인 성격에다 재치 있는 말재주 때문에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더구나 영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끼리 통하는 묘한 기류가 있어서 그 친구를 만나는 것은 오랜만에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

“문학을 하면 말이야,” 영어전공을 한 죄(?)로 학교에서 보직을 맡고 있는 그 친구가 얼큰해서 입을 열었다.

“문학을 하면 행정을 잘 할 수 있어, 왜인지 알아? 문학 속에 모든 게 다 있거든. 난 셰익스피어를 전공했지만 내 밑에 직원들 자~알 다룰 수 있어. 문학을 하면 걔네들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단 말이야.”

얼큰해진 친구는 맥주를 연신 마시면서 신이 나서 말했고 나는 그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학을 하면 행정을 잘 할 수 있다는 그 친구의 말은 물론 과장이다. 요즘처럼 복잡다기한 세상에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 같은 것은 없다. 더구나 문학을 전공해서 행정을 잘 할 수 있다는 말은, 수영을 전공해서 비행기를 모는 법을 터득했다는 것만큼이나 과장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주장에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내가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예술분야이다.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노래하는 것도 문학이지만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끌어 내는 것도 문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비 딕>은 단순히 포경선 선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된 ‘이름붙이기’가 얼마나 인간을 힘들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눈먼자들의 도시>는 이기심에 눈이 먼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어떻게 지옥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 뿐 만인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소통의 부재가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으며, <안나 까레리나>는 왜 행복한 가족은 서로 닮았는지 그리고 불행한 가족은 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불행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오만과 편견>은 자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사교육에 목을 맨 우리사회의 학부모들과 얼마나 닮아있는가.

문학을 단지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즐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데 수 천 년의 시간을 바치고 있다. 그 긴 시간이 단지 감미로운 표현이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믿는 것은 수 천 년의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는 인류의 보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문학이 우리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혜안이다. 모든 일은 잎과 줄기, 그리고 가지가 있다. 잎을 떼어버리면 줄기가 보이고 줄기를 정리하면 비로소 굵은 가지가 보인다, 그리고 그 굵은 가지를 우리는 맥이라 부른다. 일의 맥을 보지 못하고 잎과 줄기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결코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친구의 항변에 따르면 이 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장 잘 길러 줄 수 있다는 것이 문학이다. 그 친구가 정말로 옳은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재임 중 힘들었을 때마다 독서에 몰입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아마 오바마는 책 속에서 현실정치의 어려움을 풀 혜안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온 산하가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그 단풍에만 취할 것이 아니라 그 단풍을 즐기는 사람들의 속에서 꿈툴거리는 들리지 않는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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