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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기사승인 2018.03.18  18: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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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5. 조선수군을 재건한 이순신 장군과 보성
보성사람들, 이순신과 함께 조선수군을 재건하다
처가·외가친척 있는 보성근거지 삼아 수군재건
9일 동안 머무르며 병사·전선 모아 출정준비

박곡마을 양산항 군량제공 최대성은 후방방어
백성들 어선 동원 물자 옮기고 전선 수리 도와
선조 수군폐지 명에 열선루에서 장계올려 거부
12척 이끌고 벽파진 이동 명량에서 대승 거둬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자 구례, 곡성, 옥과, 부유창, 접치, 낙안읍성, 보성 조양창을 거쳐 보성박곡, 보성군 관아로 들어왔다. 이순신은 1597년 8월9일부터 8월18일까지 보성에서 머무르며 조선수군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순신이 보성에 들어온 것은 보성이야말로 조선수군 재건의 최적지로 여겼기 때문이다. 보성에는 처가와 외가 친척이 있었기에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전선을 고치는 선소가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수군들이 많았다.

이순신은 조양창에서 군량을 확보하는 한편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왜적과의 해상전투를 준비했다. 1597년 8월18일 이순신은 보성 군영구미를 떠나 남해상에서 서해상으로 빠져나가는 울돌목이 있는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조선 수군 재건로

■일본의 재침략과 이순신 제거작전

1597년 1월 일본이 조선을 다시 쳐들어왔다. 정유재란이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군사를 정비해 조선을 재침략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략을 준비하면서 1592년부터 1596년까지의 조선에서의 전투상황을 면밀히 분석했다. 토요토미는 임진년의 조선침략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 때문에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도 조선정벌이 어려워진 이유였다고 생각했다. 전라도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곡식들이 조선관군을 먹여 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요토미는 은밀하게 이순신제거작전을 세웠다. 이순신을 제거하면 조선수군을 쉽게 궤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전라도를 최우선으로 공략키로 했다. 전라도를 쓸어버리면 조선을 쉽게 먹을 수 있다고 여겼다.

정유재란은 곧 일본의 전라도 침략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먼저 반간계(反間計)로 이순신제거작전에 나섰다. 반간계는 거짓정보를 흘려 이간질을 시키는 것이다. 정유년 초 경상도우병사 김경서(金景瑞·일명 김응서)의 진영에 왜인 가나메 도키스라(要時羅)가 찾아와 솔깃한 정보를 흘렸다. 곧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군대가 바다를 건너오니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면 그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가나메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하였다. 고니시와 가토는 적대관계였다. 외견상으로는 고니시가 조선수군을 이용해 정적인 가토를 제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김경서의 보고를 들은 선조와 조선조정은 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리고 1597년 1월21일에 경사도위무사 황신을 보내 이순신에게 어명을 전하고 즉시 출정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복병을 대기시키고 기다릴 것이라며 출정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출정하지 않았다는 보고에 선조는 대노했다. 이순신이 싸우려 하지 않아 가토의 목을 베지 못했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조선은 끝났다”며 이순신을 원망했다. 서인의 거두이자 원균의 친척인 윤두수와 이산해, 김응남 등은 이런 선조의 비위를 맞추며 이순신을 모함했다. 원균 역시 장계를 올려 ‘수군이 바다에 나가 싸운다면 왜적들이 육지로 상륙하지 못해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라며 출정하지 않은 이순신을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김경서의 부추김은 분명히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한 반간계였다. 가토는 이미 1월13일에 다대포에 도착한 상태였다. 선조는 1월28일 이순신을 충청·전라 양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경상수군통제사로 발령했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한 계급 강등시키고 육군으로 보냈던 원균을 수군으로 복귀시킨 것이다. 이러는 사이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은 이순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조정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순신의 파직과 백의종군

2월 4일 사헌부는 이순신을 잡아들여 죄를 물어야 한다며 탄핵했다. 선조는 이틀 뒤 이순신을 잡아올 것을 은밀히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우의정 겸 도체찰사 이원익은 “왜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조선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가두면 안 된다”며 “원균을 수군으로 기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무시했다.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금부도사에게 잡혀 한양으로 압송됐다.

3월 5일 한양에 도착한 이순신은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당시 선조가 거론한 이순신의 죄는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공격하지 않아 놓아줌으로써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로를 가로채고 남을 죄에 몰아넣은 죄, 제멋대로 행동한 죄’(欺罔朝廷, 無君之罪, 縱賊不討, 負國之罪, 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姿, 無忌憚之罪)였다. 상당수 조정신하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순신은 3월12일 한차례 고문을 받았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받았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당시 병조판서 이덕형의 문집 <한음문고>에 ‘거의 죽게 되었다’는 글만 짧게 나타나 있다. 이때 선조와 조선조정은 조선수군이 부산 앞바다로 진격해 일본수군을 공격하면 조선관군이 육지에 있는 왜적들을 쉽게 소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에 빠져 원균에게 부산진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원균 역시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공격을 하지 않아 왜적들이 부산에 상륙하게 됐다고 비난했으면서 그 자신도 출전을 주저했다. 왜냐면 거제도에서 부산까지의 바다는 왜적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마치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부산진격은 곧 죽음이었다. 권율장군은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은 원균을 잡아와 두 차례나 곤장을 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원균은 1597년 7월5일, 200여척의 전함을 몰고 부산 앞바다로 떠났다.

하지만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은 7월16일 칠천량 전투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원균은 물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조방장 흥양현감 배흥립 등 용장들이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가까스로 살아나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라도로 후퇴했다. 조선수군이 궤멸당한 것이다. 허무맹랑한 작전계획을 가지고 일본수군 한복판으로 조선수군을 진격토록 한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무지와 무능이 조선수군 장졸들을 죽게 만든 것이었다.

한편 3월13일 선조는 이순신을 처형하라고 말했다. 이순신을 고문한 다음 날이었다. 이순신은 이제 죽은 목숨이었다. 이때 72세의 원로대신 정탁이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정탁은 1천298자(字)로 써진 신구차(伸救箚, 목숨을 걸고 구명하는 상소문)를 올리고 이순신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전쟁 시국에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선조는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이순신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도록 했다.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1일 감옥에서 풀려났다.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하루를 쉬고 4월3일 이순신은 권율이 있는 경상도 초계로 길을 떠났다.아산에 머물던 4월13일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4월19일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백의종군 길을 나서야 했다. 그리고 권율을 만나기 위해 구례와 순천, 여수 등지를 오가다가 6월4일 경남 합천군 초계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

초계의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은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이틀 뒤인 7월18일 들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이순신은 통곡을 거듭했다. 조선수군 궤멸 소식에 도원수 권율도 황망해했다. 권율은 이순신을 찾아와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이순신은 “제가 한 번 나가보고 계책을 세움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권율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순신은 남해 바다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7월18일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와 마을을 찾아다니며 흩어진 수군병력을 불러 모았다. 병기와 군량을 찾아냈다. 이때 선조는 조선수군 궤멸 소식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제 이순신밖에 이 나라를 지킬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597년 7월22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보낸 유서에서 “지난번 그대의 직첩을 바꾸고 죄인의 이름으로 백의종군케 한 것은 과인의 지모가 밝지 못하여 생긴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리고는 “이토록 패전의 욕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며 낙담의 심경을 토로했다. 선조는 참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왕이었다. 충신과 간신을 헤아리지 못했다. 전략에 어두워 조선수군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은 날은 8월 3일이었다. 이때 이순신은 사천 노량 등지의 해안마을을 둘러보고 진양 수곡면 원계리에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이날의 일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맑음. 이른 아침 뜻밖에도 선전관 양호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다. 내용인즉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임금을 향해 숙배(肅拜)한 뒤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참으로 담담한 내용이다. 목숨을 바쳐 싸웠건만 선조는 오히려 자신을 고문하고 관직을 삭탈한 왕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선조에 대한 원망의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 직첩만 내려 보냈을 뿐 아무런 지원도 없는 것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군사도, 장비도 없는 삼도수군통제사였건만 이순신은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그 궁리만 했다.

한편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몰살시킨 일본군은 전라도 침공을 시작했다. 육군은 전라도로 진격하고 수군은 전라도 해안으로 향했다. 왜군은 8월3일 진주를 함락시키고 하동을 거쳐 구례, 남원으로 향했다. 이때 이순신은 일본군과 아주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순신은 8월4일 압록강원(곡성군 죽곡면 압록리), 8월5일 옥과현(옥과면), 8월7일 곡성 강정마을(석곡면 유향리)에 머물며 어떻게든 군사들을 모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느라 바빴다. 무기 역시 구하기가 힘들었다. 8월7일 도망치는 군사들에게서 말 3마리와 활·화살 약간을 징발한 것이 전부였다. 8일 새벽 곡성을 떠난 이순신은 아침에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창고는 불타버리고 재만 남아있었다. 전라병사 이복남이 적에게 식량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해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부유창 근처에 있던 고을 수령들은 통제사 이순신이 왔다는 소식에 문책을 받을까봐 도망 가기에 급급했다. 8일 오후에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부 관청에는 곡식과 무기 등이 약간 남아있었다. 군사들이 서둘러 도망가느라 미처 불태우지 못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총통과 같이 무거운 화포는 땅속 깊이 묻어 숨기고 다른 무기들은 군사들이 짊어지도록 했다. 9일 이순신은 낙안(순천시 낙안읍)에 도착했다.

길에는 깊은 산속으로 피난 가는 백성들이 즐비했다. 백성들은 이순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제 사또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들의 손을 부여잡으면서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노인들은 술병을 바치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순신이 받지 않자 울면서 사정했다. 이순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이순신의 백성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이순신, 보성에서 조선수군 재건발판을 마련하다
 

1955년보성읍전경

8월9일 저녁에 이순신은 보성 조양창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순신 행록>에는 이때 이순신을 따르는 군사가 120명에 달한 것으로 나와 있다. 보성 도착 시 병사수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8월3일 진주에서 출발할 때 군관 9명과 병졸 6명 등 모두 15명밖에 되지 않던 군사가 순천에서는 60명이 됐고 보성에 이르렀을 때는 120명에 달했다’
 

고내마을 조양창이 있던 자리

보성에 도착한 이순신은 향촌사림들에게 전령을 보내 식량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많은 이들이 식량을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식량을 얻게 됐다는 뜻의 ‘득량’(得糧)이 됐다. 그런데 고내(庫內)마을에 있는 조양창(兆陽倉)에 곡식이 남아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내마을은 조성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조성면 우천리다. 조양창은 예전에 주월산과 방장산 일대에 자리했던 조양현성의 식량창고였다.

이순신은 서둘러 조양창을 찾아갔다. 봉인된 창고에는 600석(1천200가마)의 군량이 보관돼 있었다. 이순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600석은 장정 600명이 1년 동안 먹을 식량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해결된 것이다. 이순신은 이 군량을 조양포로 옮긴 뒤 다시 조선수군 재건의 근거지로 삼을 군영구미(軍營仇未)로 보내기로 했다. 군영구미는 1457년(세종 3년) 에 개설된 수군만호진이다.

그러나 군사가 없어 옮길 일이 걱정이었다. 이때 팔을 걷어붙인 보성백성들이 이순신에게 몰려들었다. 보성백성들은 수레를 끌고 오거나 지게를 지고 와서 조양창에서 조양포까지 쌀을 실어 날랐다. 어민들은 배를 가져왔다. 1천여척의 어선들이 순식간에 포구에 배를 댔다. 이순신을 따라온 군졸과 어민들은 힘을 합쳐 이날 하루만에 ‘군량수송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보성군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과 조선을 지켜낸 최대성과 보성의병
 

보성군 고지도(1872)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에는 보성군민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보성군민의 헌신에 힘입어 조선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처가와 외가 사람들은 물론이고 보성군민들은 이순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보성은 대대로 의향이었다. 임진·정유재란뿐만 아니라 정묘호란과 구한말 일제침략 당시에도 수많은 보성의 인물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박정중 해설사가 방진관 담벼락에 전시된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방진관 내에 전시돼 있는 선무원종공신녹권
방진관 전시관 내부 모습

의향보성은 보성군민들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조상들의 뜨거운 나라사랑과 애족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성군청 뒤에는 방진관이 있다. 예전에는 군수 관사였는데 이순신유적복원사업의 하나로 리모델링한 뒤 2016년 3월 이순신교육관으로 개관됐다. 보성군수를 지낸 이순신장군의 장인 방진과 부인 방씨의 일화 등이 잘 전시돼 있다.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보성에서 11년 동안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신 장군은 보성읍성에 들어오기전 박곡마을 양산항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수군재건을 지휘했다. 양산항의 집앞에 세워진 오매정.

이순신은 8월11일부터 14일까지 보성 박곡마을에 머물면서 군사와 배를 모았다. 양산항의 집에 임시로 조선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조선수군재건의 본부로 삼았다. 선조와 영의정 유성룡 등에게 7통의 장계를 올리는 한편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전령을 보내 군영구미로 전선과 함께 들어올 것을 명했다. 양산항은 조선 명종 때 영해(영덕)도호부사를 지낸 인물로 참봉 양응덕의 아들이자 양팽손의 손자다.

이순신이 박곡마을에 머물면서 조선수군재건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최대성과 보성의병들이 후방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최대성은 고려 말 대학자 최해의 8대손이다.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의 한후장이었던 최대성은 옥포해전에서 일본수군 전선 1척을 격파시켰다. 최대성은 조선수군의 해상작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나 나중에는 의병들을 모아 보성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최대성 장군 영정
최대성 장군 충절비와 장군상

최대성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수차례 등장하는 인물이다. 최대성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을 도와 후방에서 조선수군을 지키고 병참활동을 지원했다. 이순신은 모의장(募義將) 최대성과 송희립에게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함께 자신을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낼 것을 지시했다. 최대성은 1천여 명의 보성의병과 함께 이 임무를 잘 수행했다. 1598년 3월까지 2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최대성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1597년 9월 이후에도 보성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1598년 6월8일 군두혈전에서 안치고개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 군두혈전에서 최대성과 그의 아들 언립·후립, 아우 최대민, 종제 최대형 등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외에도 형제노비였던 두리동과 갑술을 비롯 수많은 보성의병들이 이 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비장한 장계를 올린 보성 열선루

 

1739~1750년 비변사인방안지도

8월14일 이순신은 보성관아에 도착했다.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보성읍성 열선루(列仙樓)에 머물렀다. 열선루는 15세기 초 출성된 보성읍성 객관(客館) 북쪽에 있던 누정이었다. 원래는 취음정(翠蔭亭)이 있었는데 보성군수 신경이 누각을 다시 짓고 열선정이라 이름 지었다.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보성을 분탕질할 때 불태워져 버렸다. 뒤에 보성군수 이직이 중건했다.
 

보성군청 앞에 전시돼 있는 열선루 주춧돌. 보성군청 옥상에서 찍은 사진이다.
열선루와 보성읍성터 자리 전경

열선루가 있던 자리에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들어서있다. 이 교회는 보성초등학교 와 맞붙어 있는데 몇 해 전 보성군청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주춧돌과 외벌대(댓돌)들이 발견됐다. 이 주춧돌들은 현재 보성군청 광장에 전시돼 있다. 보성군은 열선루 복원공사 때 이 주춧돌들을 그대로 사용할 계획이다.

8월 15일 이순신은 보성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가져온 선조의 유지(有旨·편지)를 받았다. 유지내용은 ‘약세인 조선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의탁하여 싸우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불과 보름 전에 수군을 재건해 싸우라 해놓고 이제 와서는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싸우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고민하고 고민했다. 조선수군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중일기> 8월15일자에는 이순신의 편치 않은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있다.

‘8월15일 비가 계속 내리다가 늦게 개었다. 식사 후 열선루에 나가 있었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8월7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영의정(유성룡)은 경기도 지방을 순찰중이라 했다. 곧 받았다는 장계를 작성했다. 보성의 군기를 점검한 뒤 네 마리 말위에 나눠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를 비추는 것을 보았으나 마음이 매우 편하지 않았다’

<난중일기>에 등장하고 있는,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장계다. 장계 내용은 승지 최우해가 지은 <충무공 이순신 행장>에 나와있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칩입하지 못한 것은 조선수군이 왜군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없앤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왜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곧바로 한강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則猶可爲也) 전선이 비록 적지만(戰船雖寡) 미천한 신하가 죽지 아니했으니(微臣不死)왜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則賊不敢侮我矣)’

이날 이순신은 많은 술을 마시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임금과 조정대신이 수군을 그리 업수 여기니 원통한 마음이 깊었다. 어떻게든 조선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군관들과 함께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데 수군을 없애라고 하니, 통곡만 터져 나왔다. 추석을 맞아 보름달은 휘영청 한데 시름은 깊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순신이 한산도가(閑山島歌)의 한(閑)을 한(寒)으로 바꿔 이날 열선루에서 읊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장한 마음과 원통한 마음을 한산도가(寒山島歌)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寒山島月明夜 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이내 몸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선조는 이순신의 장계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순신이 갖고 있는 배는 12척에 불과했으나 왜군은 부산본영에만 600척의 전선이 있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지략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12척의 배로 일본수군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듯싶다. 조선수군을 폐지하지 않아도 일본수군에 의해 전폐당할 신세이니, 굳이 수군을 폐지하라고 다그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보성읍성 및 이순신 상유십이 공원

 

 


■이순신의 출정

8월17일 이순신과 120명의 군사들은 보성관아를 떠나 봇재를 넘어 회천면 벽교리·전일리 일대 백사정(白沙汀)에 도착했다. 백사정은 회령진성 포구 앞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는 군사기지였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군사들의 군기를 점검한 뒤 점심을 먹었다. 그 다음 회령포성(會寧浦鎭)의 전진기지인 군영구미(軍營仇未)로 갔다. (학자에 따라 백사정과 군영구미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군영구미는 지금의 회천면 전일2리 군학마을에 자리하고 있던 수군기지였다. 1457년(세종 3년)수군만호진이 개설되면서 ‘군영구미’라 불렸다. <호남진지>의 회령포진지에 따르면 회령면 휘리포라 부른 기록이 있다. 배를 만드는 휘리, 군선이 정박했던 구미, 성곽이 있던 군학 등 3개 마을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합쳐 ‘구미영성(龜尾營城)’이라고도 했다.

8월18일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을 인수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가졌다.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장졸이 전부였으나 조선수군들의 사기는 높았다. 이날 이순신은 “우리들이 다 같이 임금의 명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라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이충무공의 뜨거운 충성심과 나라사랑에 절로 눈물이 나온다.

회령진에서 미약하나마 조선수군의 위용을 갖춘 이순신은 해남 이진(梨鎭: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어란포와 장도를 거쳐 8월29일 진도 벽파진에 진을 쳤다. 그리고 1597년 9월16일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수군과 울돌목에서 맞붙었다. 그리고 대승을 거두었다. 명량대첩 승리는 이순신의 지략과 보성군민을 비롯한 남도 땅 백성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은 세계 해전 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인 명량대첩을 이뤄냈다.



도움말 = 김세곤, 노기욱, 정만진, 박정중, 박미숙, 서광춘, 보성군

사진제공 = 위직량, 류기영, 보성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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