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49>-제4장 이치전투

6월 3일 오산 독산성과 세마지(洗馬地)에 이르니 인근에 주둔한 왜군은 엄청난 대병력에 놀라 퇴각해 용인 벌판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조선군을 유인하는 일종의 계략이었다. 윤선각은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겼다.

“저것들이 싸우지도 않고 내빼는 것 보니 수상하지 않소?”

“수에 밀려서 겁먹고 있소이다. 요것들 당장 쓸어버려야지.”

이광은 숫자만 믿고 들떠있었다. 윤선각과도 죽이 맞았다. 그러나 중위장 권율 생각은 달랐다.

“적도들이 선점한 곳에는 계략이 있을 것입니다. 무시하고 계속 올라갑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하류에 방어선을 치고 대전을 도모하기 위해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오이다.”

그러나 이광은 이를 묵살하고 용인으로의 부대 이동을 명령했다. 군왕군의 숫자만 보면 왜군 1천600은 간단없이 해치우리라 장담했다.

부사 출신 선봉장 백광언과 이지시도 계략에 빠진 것을 의심하고 이광에게 고했다.

“우리 군사는 비록 많다 하나 여러 고을에서 모은 오합지졸이니 병력의 많음과 적음을 논하지 말고 훈련을 시켜서 병법을 익히도록 하고, 고을의 수령을 장수로 삼아 어느 고을은 선봉을 하고, 어느 고을은 중군을 시켜 한 곳에 모이지 말고 10여 둔으로 나누어 있게 하면 한 진이 비록 패하더라도 곁에 있는 진이 계속해 들어가서 차례차례 서로 구원하게 되니 이긴다면 완전히 이길 것이고, 패하더라도 전부가 패하지 않을 것이오”

이광은 이런 의견도 묵살했다.

6월 5일 이광이 용인현 남쪽 벌판에 나아가 진을 치고 선봉장 백광언을 시켜 정탐하도록 했는데 용인현 북쪽 문소산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의 기세가 보기에 약해 보였다. 섬멸할 기회였다. 백광언이 이광에게 다시 말했다.

“적도들이 먼저 들어와 산골에 잠복해 있소이다.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해서 진격이 쉽지 않소이다. 진격을 재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래서 안된다, 저것은 저래서 안된다. 명색이 장수란 자가 왜 그렇게 용렬하오? 지금에 와서 그런 헛소리하다니. 말 하려면 진작에 하던지…”

이광이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보고 느낀 바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작에 알았으면 진작에 말씀드렸지요. 진중에서는 상황에 따라 진퇴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뭐야? 대드나?”

자존심 강하고 완고한 이광은 군령을 어겼다는 죄목을 씌워 백광언을 형구에 눕혀 심하게 곤장을 쳤다. 백광언은 거의 죽게 되었다. 이광은 대들면 이렇게 간다는 것을 다른 졸개들도 알아야 한다는 듯 그를 더 엄하게 다스렸다.

“씨발놈,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누가 남아있겠나. 차라리 적에게 죽겠다.”

백광언이 분하여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상처 부위를 싸매고 일어난 지 하룻만에 동료 이지시를 불러내 군사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것은 어떤 분풀이 같은 진격이었다. 세밀한 작전이라도 힘겨운 판에 홧김에 서방질하는 꼴이었으니 자중지란의 결정판이었다.

진중에는 때마침 짙은 안개가 꽉 들어차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산 속에 잠복해 있던 적이 안개를 이용해 갑자기 총을 쏘고 돌격해왔다. 그들이 유격전을 쓰는 셈이었다. 앞뒤, 옆에서 기습하고, 기동부대가 출격해서 전후좌우에서 베고 조총을 쏘니, 졸지에 수많은 군사들이 피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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