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9. 기묘사화의 주인공 조광조와 화순 능주

조선을 바꾸려던 풍운아, 화순에서 꿈을 접다

반정공신 견제하려는 중종 눈에 띄어 발탁·중용돼

조광조, 성리학 기초한 이상국가·성군(聖君) 꿈꿔

중종,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조광조에 등 돌리고

위기 느낀 반정공신 ‘주초위왕’(走肖爲王)음모까지

결국 누명쓰고 능주로 귀양 한 달 만에 사약 받아

양팽손이 수습, 죽수·심곡서원에 두 분 배향돼 있어
 

1750년경에 국오 정홍례가 그린 조광조 초상

■유배 가는 조광조와 그를 위로한 눌재 박상

1519년 음력 11월 무등산 앞 분수원(당시 광주읍성 남문 밖 10리에 있는 곳으로 지금의 증심사 입구 계곡쯤으로 추정된다)에서 한 죄수가 압송되고 있었다. 죄수는 귀향살이를 가는 중이었다. 죄수가 떠나온 곳은 한양이었다.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이 유배지였다. 죄수는 매우 피곤한 기색이었다. 비록 수레에 실려 왔지만 한 달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듯싶었다. 죄수의 입성(옷차림) 역시 몹시 허술했다. 추운 듯 몸을 웅크리며 덜컹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죄수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세도가 등등했던 그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죄인신세로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처지가 돼버렸다. 죄수 조광조가 분수원에 다다랐을 때 도포를 갖춰 입은 선비가 황급히 달려와 죄수를 반겨 맞았다. 눌제(訥薺) 박상(朴祥) 이었다. 눌재를 모시고온 이가 나졸들에게 술 몇 병과 고기를 건네주고 잠시 이야기할 틈을 달라고 사정했다. 나졸들이 저쪽으로 짐짓 비켜섰다.

박상이 조광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을 건넸다. “조공(趙公), 이게 무슨 일이요. 성상(중종을 일컫는다)이 잠시 마음이 흐려져 조공을 이곳으로 보냈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곧 공을 다시 부를 것이오. 능성에서 머무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다 보면 반가운 기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오. 역모자의 누명은 곧 벗겨질 것이오. 조공처럼 임금과 나라를 위해 충성한자를 역모자로 몰아가다니, 통분하고 비통할 뿐이오”

박상이 조광조를 위로했다. 조광조는 처연한 표정으로 눌재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눌재의 위무에도 조광조의 심사는 복잡했다.

“성상이 과연 내 목숨을 부지시켜줄까? 마지막에 본 성상의 눈빛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고름을 짜낸 듯, 시원한 표정이었다. 성상은 나를 귀양 보내면서 매우 홀가분해 했다. 더구나 내 목숨을 노리는 남곤·심정·홍경주 등이 성상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있는데,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조광조는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눌재를 보면서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눌재는 조광조와 함께 중종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공훈공신들의 전횡에 맞서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중종과 반정공신들의 미움을 받아 거의 죽음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그때 조광조, 자신이 나서서 눌재의 목숨을 살려냈다. 그 일처럼 성상도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광조는 일순 안도감이 들었다. 살아있는 눌재를 보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본 것이다. 조광조와 박상은 짧은 해후를 아쉬워하면서 작별을 해야했다. 눌재는 분수원에서 조광조를 만난 감회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잡고 헤어졌을 때/조정에서 일하던 그대가 천리나 되는 이곳에 귀양 옴이 참으로 안타까웠노라/ 귀양살이와 조정에서 벼슬함을 구별하지 마소/저승에 가면 아무런 차등이 없는 것이니.

그러나 결국 조광조는 한 달 뒤 사약을 받고 절명한다. 조광조의 시신은 가매장됐다가 다음해 봄에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졌다. 눌재 박상은 그의 관이 실린 소달구지가 북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광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挽詩)를 짓는다. 만시의 제목은 ‘逢孝直喪(봉효직상)’이다. ‘효직의 상을 당하여’라는 뜻인데 효직은 조광조의 자(字)이다.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후일 저 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인간사 부질없는 시비 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無等山前曾把手(무등산전증파수)/牛車草草故鄕歸(우차초초고향귀)

他年地下相逢處(타년지하상봉처)/莫說人間?是非(막설인간만시비)

조광조가 죽은 뒤 그와 함께 하던 사림파 인사들 중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도는 이가 많았다. 박상은 이들을 거둬 보살폈다. 조광조의 동문인 김안국과 심세필이 여주에서 후학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여주목사 이희보에게 조곡 200석을 빌어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 매년 농사를 지어 조곡을 갚았다.

■시대의 풍운아 조광조, 능주로 귀양을 오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는 능성현(화순군 능주면)으로 유배를 온다. 임금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 총애가 불행의 씨앗이었다. 임금을 성리학의 틀에 끼워 성군(聖君)으로 만들려한 것이 화가 됐다. 임금은 자신을 좌지우지하려는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꼈다. 이런 임금의 마음을 정적들은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든 조광조를 제거하려고 임금에게 온갖 말과 비방을 전해 그를 죽이도록 했다.
 

조광조가 능주 유배당시 기거했던 초가집

아마도 조광조는 그런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조광조가 귀양살이를 했던 곳은 지금의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능주에 있는 조광조 적려유허지에 가면 애우당(愛憂堂)이 있는데 그 안쪽에 조광조가 거처했다는 초가집이 있다. 물론 당시의 초가집은 훨씬 더 초라했을 것이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다가 곧 쓰러져 내릴 것 같은 초가집에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조광조는 날개 꺾인 새라고 여겼다.
 

애우당 현판
애우당

애우당에는 조광조가 귀양살이를 하면서 남긴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가 써진 편액이 걸려 있다. 그 곁에는 그가 사약을 받으면서 남겼다는 절명시 편액이 같이 자리하고 있다. 능성적중시에는 조광조가 절망에 빠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내용이 구구절절 담겨져 있다. 자신의 처지를,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마부와 화살 맞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새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독안에 빠져서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암담한 심정을 남기고 있다.

화살 맞은 새와 같은 나의 신세 누가 가여워 해줄까(誰憐身以傷弓鳥:수련신이상궁조)

말 잃고 허전한 노인의 마음만 같아 저절로 웃음 짓네(自笑心同失馬翁:자소심동실마옹)

원숭이와 학은 내가 돌이키지 않는다고 성을 낸다네(猿鶴定嗔吾不返:원학정진오불반)

이제 엎어진 독 안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깨닫노라(豈知難出覆盆中:개지난출복분중)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가 두려워했던 일은 한 달이 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임금이 내린 사약이 온 것이다. 조광조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은 사약을 앞에 두고 절명시를 쓴다. 아니나 다를까. 조광조는 유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사약을 받는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아래 절명시를 쓴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愛君如愛夫: 애군여애부)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후세 사람들은 38세의 젊은 개혁가,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어간 그 자리에 당우를 세웠다. 그리고 절명 시 1구 첫 글자인 애(愛)와 2구 첫 글자인 우(憂)를 따와 애우당이라 했다. 후세사람들은 절명시에 담겨진 의미대로 愛가 임금에 대한 사랑을, 憂는 나라에 대한 걱정을 담은 것이라 풀이한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임금에게 충성심을 보인 조광조의 큰 그릇됨을 칭송한다.

그렇지만 작가의 생각은 다소 다르다. 그토록 임금을 도와주었는데, 그리고 성군이 되게끔 정성을 다해 모셨는데, 임금을 손안에 넣고 흔들어대는 대신들의 전횡을 막아내려 애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임금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가득한 시라고 여긴다. 임금은 몰라줬지만 하늘은 내 마음을 알 것이라는 체념과 한스러움이 한자 한자에 가득 배어있다.

어쩌면 애우당이라는 당호는 임금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충절을 보여야 한다는 조선사대부들의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역사 비틀기’인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도 조광조가 임금에게 충성과 복종심을 보여줬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조광조의 신위회복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가운데 조광조를 다시 살려내려면 억울하게 죽어갔지만 끝까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였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했기에 애우당이라는 당호를 지은 것은 아닐까?

조광조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8-1545)이 수습했다. 임금으로부터 내침을 받고, 조정을 장악한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죽은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양팽손은 자신이 사는 마을 골짜기인 쌍봉사 근처의 계곡(화순군 이양면 중리 서원동 마을)에 가묘를 만들었다. 다음 해에 조광조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을 시켰다.

양팽손은 그의 나이 22세였던 1510년(중종 5년)에 조광조와 같이 사마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사간원 정원과 홍문관 교리 등을 지내며 조광조와 함께 훈구파와 맞서 조선을 개혁하려 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을 당시 양팽손은 기묘사화로 파직당해 화순에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조광조는 죽음을 앞두고 양팽손을 찾았다. 양팽손이 전갈을 받고 급하게 오자 그때서야 “양공,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한다.
 

죽수 서원 고경루

이후 양팽손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에 학포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글과 그림을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속절없는 세상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어지러운 세월의 한복판에서 풍운아처럼 살던 조광조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다 목숨을 잃었다. 양팽손은 그 조광조의 죽음을 애달파하다 세상을 등졌다. 그런 두 사람은 사후에 함께 하고 있다. 화순군 한천면 죽수서원과 경기도 용인시 심곡서원에 두 사람의 신위가 같이 모셔져 있다.

능주에서 40여㎞ 떨어진 담양군에 있는 소쇄원(瀟灑園) 역시 조광조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은사인 정암공이 유배되자 고향인 담양 지석마을에서 은거했다. 이때 양산보는 지석마을 계곡에 원림(園林)을 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자연미를 최대로 살려 조성된 조선 중기 대표적인 정원이다.

■중종과 조광조

당시 조정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앉힌 반정공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1506년(연산군 12)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은 군사를 동원해 반정에 성공했다. 이후 이들은 연산군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왕으로 추대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반정공신들의 전횡이 시작된 것이다.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지냈다. 자연 반정공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중종은 연산군 때에 화를 입은 사림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한편 유학 진작에 힘을 썼다. 그때 눈에 띈 인물이 조광조다. 조광조는 아버지가 함경도 지방에서 근무할 때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김굉필을 만나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김종직 문하 제자의 한명으로 김종직 이후 사림세력의 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중종 5년(1510) 소과인 생원시에 입격했다. 중종 10년(1515) 알성시 별시에 급제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성균관 전적과 사간원 정언 등에 앉히고 곁에 두었다. 성리학에 몰입해 있던 조광조 등의 사림파들은 유교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실현해보고자 했다. 군주의 수신(修身)과 언로(言路)의 확충을 강조했다. 현량과를 도입해 고루 인재를 등용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소학이나 향약을 널리 보급시켰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개혁은 너무도 급진적이었다.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으면 ‘소인’(小人)이라 지목하고 폄훼했다. 기존 사림세력이었던 남곤(南袞)과 심정(沈貞)까지도 소인이라며 비난해 사림파의 힘을 스스로 약화시켰다. 그런데다 너무도 무리하게 반정?외척 공신들의 공훈을 3/4이상 삭탈하고자 했다. 무려 76명이었다. 벼슬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목숨까지 잃을 까봐 위기감을 느낀 반정공신들은 마침내 조광조가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우기에 이르렀다.

훈구파들은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술수를 꾸몄다. ‘趙’ 글자 형태로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이를 파먹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走肖’는 ‘趙’ 자의 파획(破劃)이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을 나타나게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 언론사가 실험한 결과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됐다. 벌레는 꿀만 먹지 않고 모든 잎을 다 먹어치웠다. 결국 훈구파가 의도적으로 ‘走肖’형태로 나뭇잎을 파낸 것으로 추정된다.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한 밤중에 대궐로 들어가 조광조 등의 무리가 모반을 꾀한다고 거짓 고(告)했다. 중종은 군사들을 풀어 조광조·김식(金湜)·기준·한충·김구·김정·김안국·김정국·이자 등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멀리 귀양을 보냈다. 이후 조광조 등 70여명에게 사약을 내려 모두 죽였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이때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한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 대부분은 호남사림이었다. 기묘명현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은 박상, 최산두, 양팽년 등이 있다. 기준, 유운, 윤구, 안처순, 고운, 박소, 송순등도 이 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사림인물들이다.
 

능주 영정각에 있는 조광조 선생 영정

중종이 조광조를 죽인 것은 조광조가 왕권에 지나치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조광조 등 사림세력은 반정공신들의 위세를 꺾어 왕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중종과 사림은 서로에게 방패막이였다. 그런데 반정공신들을 축출시킨 조광조는 왕까지 좌지우지하려 했다. 중종은 그런 조광조에게서 염증을 느꼈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고 여겼다. 조광조는 왕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 일쑤였다. 도학의 가르침에 맞춰 모든 나랏일을 처리하려 했다.

중종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었다. 중종의 입장에서 보면 훈구파(반정공신)들과는 권력을 공유하며 적당한 선에서 왕의 권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와의 동거에서는 권위가 훼손되기 일쑤였다. 결국 중종은 개혁보다 현상유지를 하기로 결심했다. 조광조가 반역했다며 거짓 고변한 남곤조차 조광조를 죽이는 것에 반대했지만 중종은 “마음이 곧지 않다.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며 조광조를 죽도록 했다.

남곤은 조광조의 사형이 확정되자 자신의 일을 후회했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쓴 모든 글을 불태우게 했다. 이런 이유로 당대 최고의 문사(文士)였던 남곤의 글은 오직 한 수만 전해지고 있다. 남곤은 영의정 자리에 올랐으며 천수를 누렸다. 중종의 심기를 헤아려 완급을 조절했던 지혜 때문이다. 조광조가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절명한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너무도 성급했던 조광조의 개혁정치

조광조는 조선이 성리학적 이념과 가치에 근거하여 운영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랬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얻어 반정공신들의 세를 꺾는 데는 성공했지만 너무 성급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중종의 뜻도 무시해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조정을 장악했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었고 결국은 중종도 등을 돌렸다. 이는 곧 그가 죽음에 이르는 길이 돼버렸다.

조광조는 성리학에 의해 움직이는 이상적인 나라건설을 꿈꿨다. 그는 뛰어난 성리학자였지만 정치가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성리학의 가치에 매몰돼 임금의 뜻까지 무시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조광조가 중종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소격서(昭格署) 폐지 여부를 놓고서이다. 소격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기관이었다. 그는 성리학에 의해 운영되는 나라에서 도교 따위의 미신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종은 계속해서 소격서 운영을 희망했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하늘에 대한 제사는 명나라 황제가 할 일이지 조선의 왕이 할 일은 아니다’는 사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더 나아가 ‘역대 조선 왕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아주 위험한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주장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고 반론하자 조광조는 “세종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이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중종어진. 중종은 어진을 남기지 않았다. 아들 인종이 내시들의 기억을 빌려 화공들에게 그리도록 했다.

중종은 세종뿐만 아니라 역대 임금의 권위까지 무시하는 조광조의 오만함에 분노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성리학 개념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왕의 권위에 대드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조광조의 개혁은 반정공신 등 훈구파들을 제거하는데 초점이 모아졌을 뿐 국방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등 국가현실을 개선하는 데는 등한히 했다는 점에서 지지기반이 엷었다.

조광조는 유교에 기반한 국가체제를 세우는 데만 관심이 많았을 뿐이다.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는 개혁적 조치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그의 개혁은 반쪽짜리 개혁이었다. 성리학에 기초한 임금의 다스림과 국가체제운영에만 논쟁이 모아졌을 뿐, 부국강병과 민생개선은 외면됐다.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겠다며 도입한 현량과 역시 사림파 인사들을 등용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조광조가 그토록 강조했던 성리학 정치의 순수성에 오점을 남겼다.

1518년에 대사헌이 된 조광조는 중종을 설득해 현량과를 설치했다. 조광조를 따르던 신진사림파들은 과거시험에서 드러내놓고 자신문하의 서생들을 등용시켰다. 조광조 사람이었던 이조 낭관들은 자신들의 편이 아닌 관료들을 ‘자질이 없다’며 내쫓았다. 조광조는 또한 성리학적 가치를 기반으로 해 철저하게 신분질서를 유지했다.

조광조가 모반의 누명을 쓰고 죽음에 이른 것은 ‘적을 너무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고 합리적인 인물은 끌어안아 자기세력으로 삼아야 하는데 조광조는 사림파 학자들만 끌어안고 조정을 이끌려 했다. 사람들을 군자와 소인, 두 가지 분류로 나눠 중용하거나 배척했다. 흑백논리로 사안과 인물됨을 판단했다. 조광조 등장 이전에 사림파를 이끌었던 정광필, 남곤조차도 반대파라며 몰아붙이기도 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너무도 급진적이었다.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해 나라를 굳게 세우는 실용적인 방향에서 개혁을 추진하기보다는 조정의 반정공신들을 몰아내는 데만 너무 치중했다. 유교의 가르침을 따라 왕이 선정을 베풀고 선비들은 수양을 통해 몸가짐을 곧게 하면 이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했다. 쉽게 말해 공감대가 없는 ‘그들만의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가 그토록 신봉했던 성리학은 그의 사후 조선의 정신이 된다. 조광조가 널리 보급한 향약(鄕約)과 곳곳에 서원은 사림파의 기반을 튼튼하게 했다. 사람의 세가 커짐에 따라 선조 때에 이르러서 조선은 사림파의 세상이 됐다. 조광조는 비록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의 정신은 충과 의를 중시하는 사림의 정신이 돼 조선을 움직였다.

■ 화순에 남아있는 조광조의 자취들

조광조는 사후 인종 때 복관됐다.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됐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에 꼽히고 있다. 조광조의 흔적은 귀양살이를 했던 화순의 초가집에 남아있다. 사후에 그를 모신 죽수서원에서는 개혁가 조광조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
 

능주에 세워져 있는 정암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
영정각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광조 적려유허지 애우당 안쪽에는 적중거가(謫中居家)라고 써진 초가집과 영정각이라고 써진 기와집이 있다. 적려(謫廬)란 유배지라는 뜻이다.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고자 세운 비다. 적중거가는 권력의 무상함을 알려주는 곳이다. 영정각에는 관복을 입은 조광조 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적려유허비는 정문에서 바로 추모비각이라고 써진 쪽문을 들어가면 있다. 이 비는 조광조 사후 150여년 후인 1667년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웠다.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죽수 서원 입구
조광조와 양팽손을 배향한 죽수 서원

서원(竹樹書院)은 조광조와 양팽손을 모신 서원이다. 1568년(선조 1) 조광조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자 1570년에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서원을 지었다. 화순의 사림 문홍헌이 서원의 터를 제공했으며 자기 집 노비를 서원 건립과 수호에 사용토록 했다. 서원 건립과 함께 곧 ‘죽수’라고 사액됐다. 60년이 지난 1630년에 전라도 유림과 김장생의 발의로 양팽손을 죽수 서원에 추가 배향했다.

죽수서원은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 명령에 따라 훼철됐다. 능주의 유림과 후손들이 서원재건을 추진, 1971년에 양팽손의 출생지인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 사우를 준공했다. 이후 1981년에 한양 조씨와 제주 양씨가 힘을 모아 원래의 위치인 한천면 모산리로 사우를 이전했다. 1989년에는 동재를 신축했다. 1986년 9월 29일에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30호로 지정됐다.

도움말 = 김세곤, 화순군

사진/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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