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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역사이야기-41.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

기사승인 2018.04.29  20: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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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시 태어나도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리라”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1.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

“내가 다시 태어나도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리라”

일제 맞서 싸우다 형장 이슬로 사라진
양진여·양상기 아버지·아들(父子)의병장
아내는 고춧가루 고문에 평생 눈 고통
두 아들은 교수형·고문 후유증으로 잃어
의병했던 이복동생도 체포돼 3년 징역
집안가족들 목숨 잃고 일제고문에 고통
광주 매월동 백마산 기슭에 두 분 묘역
거룩한 뜻과 정신 기리려는 노력 필요

■백마산에 자리한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 묘역
 

광주 매월동 백마산 기슭에 자리한 부자의병장 묘역에서 내려다본 매월동~서창간 도로. 양진여의병장과 아내, 세 아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당해 평생 고통속에 살았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그런 우국지사들의 희생과 충정에 힘입어 생겨난 나라다. 우리들은 과연 그런 선열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을까?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에서 서창으로 가는 길목에 해발고도 162.1m의 야트막한 산이 있다. 백마산(白馬山)이다. 백마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는 일제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아버지와 아들의 묘가 있다. 바로 부자의병장(父子 義兵長) 양진여(梁振汝)와 양상기(梁相基) 의병장의 묘다. 양진여의병장은 담양과 장성 일대에서, 양상기의병장은 화순 동복 일대에서 활약했다.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 당시 체포돼 부자가 두 달 간격으로 각각 교수형에 처해졌다.
 

양진여(좌측), 양상기 영정

매월동 백마산에 앞에 놓여 있는 도로는 광주에서 대촌을 거쳐 나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수많은 차량들이 이 길을 오간다. 그러나 모두들 무심하게 지나친다. 백마산 중턱에 있는 두기의 묘가 안고 있는 사연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묘지는 우리가 최대한의 예를 갖추고 찾아가고, 소중하게 여겨야할 곳이다. 쓰러져 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산과 들판을 내달리며 일제에 항거했던 이 땅의 진정한 영웅들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양진여 상기 묘소입구 안내비

매월동에서 서창 절골 마을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버스 회차지가 있다. 6·26·28·59번 버스들이 잠시 숨을 돌린 뒤 출발하는 곳이다. 회차지 입구에는 학산사(鶴山祠) 입구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다. 학산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학산사 입구를 지나 자전거도로를 따라 서창 쪽으로 200여m를 가다보면 ‘순국부자 의병장 양진여 상기 묘소입구’(殉國 父子義兵長) 梁振汝 相基 墓所入口)라는 비석이 서있다.

백마산 정상 쪽으로 100m 정도를 올라가니 두 기의 묘지가 위아래로 자리하고 있다. 묘역이 넓고 양지바르다. 후손 양일룡씨 등이 힘을 모아 정비한 덕분에 이 정도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 이전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묘 좌측에는 동백이 찬란하다. 봄기운이 완연해짐에 따라 붉은 잎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나라가 쓰러져가는 모습에 피를 토하며 통곡하던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꽃이 반 정도 떨어져나가 모습은 비록 성기지만 꽃봉오리들은 여전히 찬란하다. 저 동백들 역시 주인들의 마음을 닮았을까? 땅에 수북 쌓인 동백 잎들은 선혈인 듯 유독 붉다. 광복이 된지 70여년이 지났으니 안온(安穩)해도 되련만, 동백은 대구형무소에서 절명했던 주인들의 통한을 잊지 않고 있는 듯싶다. 그 주인에 그 동백이다. 우리들 역시 저 동백처럼 나라위해 숨져간 선열들을 잘 기억해야할 텐데…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안타깝게도 양상기 의병장의 무덤은 시신이 없는 가묘(假墓)다. 아버지 양진여와 아들 양상기 의병장은 1908년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다가 체포됐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버지 양진여는 1910년 5월 30일에, 아들 양상기는 1910년 8월1일에 각각 교수형에 처해졌다. 불과 두 달 간격이었다. 가족들은 양진여의 시신은 수습했으나 양상기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진여 의병장
 

남한대토벌작전 때 체포된 양진여 의병장

양진여는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는 것을 분하게 여긴 끝에 의병들을 모아 일제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양진여는 1908년 음력 6월 중순 의병을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30여명이 모여들었다. 양진여는 같은 달 하순 삼각산 죽청봉으로 의병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출병식을 가졌다. 이날 양진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국(我國)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어 대소의 관리에 일인(日人)을 임용하는 것은 자국의 멸망을 초래케 하는 것으로, 그 원인은 현 정부의 대신 등 현직에 감(甘)하여 자국의 존망을 개의치 아니하는 것으로 의병을 일으켜 속히 현 대신을 무너뜨리고 이어 일인의 대소 관리를 살육하고 또 각지에 침입하고 있는 일본인을 퇴거시키고 독립국으로 복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동지를 모집한 까닭이다.”

일본의 앞잡이가 돼 조선을 넘기고 있는 친일파를 제거하고 일본인들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자는 것을 역설했다. 양진여의 목표는 의병 300명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 뒤 다른 의병부대와 힘을 합쳐 서울(京城)로 진격, 점령하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에 이르러 의병수가 100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의병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양진여 의병 부대의 주 무기는 화승총이었다. 거병 당시 양진여 의병부대가 보유하고 있었던 화승총은 모두 25정이었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광주를 근거지로 삼아 추월산 일대 담양, 창평, 장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8년 11월 14일 양진여 부대는 우편체송인이었던 일본인 에또오를 살해했다. 당시 우편체송인은 단순히 서신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본헌병과 경찰들의 작전계획이나 극비정보를 전달하는 정보기관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양진여 의병부대가 일본의 정규군과 싸운 최초의 전투는 1908년 10월 26일에 벌어진 광산군 신촌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양진여 부대 의병 5명이 전사하고 화승총 4정을 빼앗겼다. 100여명에 달하는 의병부대가 20여명에 불과한 일본 토벌대에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화력이 열세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5연발인 38식 아리사카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의병들이 사용하는 화승총은 부싯돌을 사용해 심지에 불을 붙여 사용하는 것으로

사격속도가 매우 느렸다. 다시 발사를 하려면 최소한 몇 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에 반해 일본군들은 연발사격을 할 수 있는데다 곧바로 재장전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일본군은 기관단총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쏘면서 기선제압을 하고 연발사격을 하면서 돌격해오면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일본군은 양진여 의병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1908년 11월 5일 제2특설 순사대를 편성해 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광주를 비롯 장성, 영광, 나주 지역을 1주일간이나 추격해오자 양진여 부대는 전해산 부대와 연합의진(聯合義陣)을 구성해 담양 대치와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1월 23일 오후 5시 광주군 대치(현 담양군 대전면 속리)에서 300여 연합 의병과 광주수비대 우다 특무조장이 이끌었던 16명의 수비대 간에 벌어진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의병연합부대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군에서는 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의병연합부대는 24일 오후 5시까지 하루 동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다음 추월산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추월산에는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끈 20명의 토벌대가 양진여 의병부대를 기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장성 약수정(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서 기동하기 시작한 야마다 토벌대는 추월산 정상에 모여 있던 의병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추월산 전투에서 15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1명이 포로로 잡혔다. 추월산 전투를 계기로 해 양진여의병부대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추월산의병전사장소에 있는 의병전적비

이에 양진여 의병장은 1909년 2월 김재선과 이원오 등과 함께 연합의병부대를 구성했다. 양진여 의병장은 연합의진의 총대장으로 추대됐지만 지병과 부상으로 이후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일본군의 압박이 계속되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로 피신했으나 1909년 8월 26일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양진여 의병장은 체포된 후 아내를 불러 “거병 당시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국가를 위해 진력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결코 유감이 없다”며 “목숨은 아깝지 않은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욕을 당해 죽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양진여의병장은 1909년 9월 1일 광주지방재판소로 송치돼 12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는 다시 양진여에게 내란죄를 적용, 다시 교수형을 판결했다. 그리고 1910년 5월 30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돼 의로운 삶을 마쳤다.
 

양진여 출생지

양진여의병장은 제주양씨(濟州梁氏)로 고려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금성군 동재(棟材)의 둘째아들 도원수 한서(漢瑞)의 16세손이다. 1860년 5월 31일 광주군 서양면 니동(光州郡 瑞陽面 泥洞, 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에서 남중(南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서암, 휘는 진영(振永)이며, 자는 진여다. 부인 밀양박씨 순덕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양진여의병장은 부인 박씨로 하여금 처가동네인 장성과 담양 일대 10곳에 주막을 열도록 한 뒤 의병자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군 갑향면 행정리는 부인 박씨의 친정이 있는 동네였다. 광주군 벽진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벽진동)는 부인 박씨와 그 두 아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들어가 살았던 곳이다. 이런 이유로 벽진리에 가까운 백마산에 양진여?양상기 의병장의 묘가 있다. 양진여의 3남 1녀 중 장남인 상기(족보명 秉奇)는 부친의 뒤를 이어 의병장이 돼 아버지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둘째는 필수(족보명은 秉洙)로 일제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26세에 후사 없이 죽었다. 셋째가 형들의 의병활동을 지원했던 공수(족보명은 秉公)다. 양공수의 아들이 양진여·양상기 의병장의 자료를 찾아내 부자의병장의 존재를 밝힌 양일룡씨다. 양공수는 5남을 두었는데 장남이 양일룡씨다. 양일룡씨는 가문을 잇기 위해 큰 아버지 양상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진여,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 체포돼 3년 유배형을 받은 동걸(字는 瑞賢)은 양진여의 이복동생이다. 양진여 가문은 양진여·양상기·양필수 부자와 함께 양진여·양동골 형제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옥고를 치른, 충절가문이다. 양진여의병장의 아내 박순덕여사도 모진 고문을 받았다. 양진여의병장의 셋째 아들인 공수씨도 아버지와 큰형을 잃고, 작은 형은 폐인으로 죽고야마는 처참한 일을 당했다. 나라를 지키려는 신념 때문에 온 가족이 피폐한 삶을 산 것이다.



■양상기의병장
 

1907년 진위대 해산에 나선일본군

양상기는 의병장 양진여의 장남으로 1883년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운 담양 풍암정에서 심신을 닦으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20대 초반에는 대한제국의 군대였던 진위대 병사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진위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근무했다. 아버지가 의병장인 사실이 알려져 1908년 4월 23일 광주경무서 순사 직에서 쫓겨났다. 부친인 양진여보다 두 달 앞선 1908년 5월, 4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일어섰다.

양상기가 순사 직에서 쫓겨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의병부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순사로 재직할 때 주도면밀하게 의병부대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순사 직에 취직한 것도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내부사정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양상기의병부대의 주축은 대한제국의 지방군이었던 진위대 출신 군인이었다. 양상기 부대의 도통장인 안판구(安判九)는 진위대 조장(曹長)이었다. 양상기의병부대의 편제는 후군장 이문거(李文擧), 포군장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 조사윤(曺士允), 참모장 유병기(劉秉基) 등이었다.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뒤에는 그 부대원을 흡수해 의병들이 80명 정도로 늘어났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한국의 복구(復舊)’를 주장했다. ‘한국의 복구’는 일본에 협력(甘)하는 조선 관리를 제거하는 한편 각지에 있는 일인 관리를 살육해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상기 부대원들이 군자금을 모금하는 주 대상은 창평군 장면 강동에 사는 김왕사윤처럼 부자였거나, 담양군 수서기(首書記) 한응길과 같은 한국 관리 등이었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군자금을 모으면서 한편으로는 밀고자나 일제에 협력하는 일진회원들을 처단했다. 그리고 광주군 대치(大峙) 산사촌(山寺村)에 있는 호계당(護溪堂)이라는 일본 헌병 분견소를 습격해 불태웠다. 또 창평군 동서면 동산동에 거주하는 밀고자 정건섭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12월 22일의 동복 삼지촌(三枝村)전투, 1909년 4월 14일 동복군 외북면 서촌(西村)전투, 1909년 5월 17일 담양군 정면 덕곡리 전투 등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의병부대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덕곡리 전투에서는 양상기 의병부대 40여 명 중 23명이 전사해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렸다.

삼지촌 전투는 양상기 부대의 참모장인 유병기가 이끈 30명의 의병이 동복 삼지촌에서 일군과 벌였던 전투다. 당시 양상기 부대 의병 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서촌 전투는 동복군 외북면 서촌에서 일어난 전투다. 양상기 부대원 15명과 일본 토벌대 6명이 싸웠으나 화력열세로 의병 10명이 전사하고 화승총 6정과 권총 1정을 빼앗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

덕곡리 전투는 담양군 정면 덕곡리에서 양상기 의병부대 40여 명과 일제 토벌대 9명이 2시간 동안 벌인 싸움이었다. 의병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의병들이 사용했던 화승총은 사거리가 50m에 불과하고 재 사격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발을 쏘고 나면 다시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해야 했기에 신속한 응전이 어려웠다. 이에 반해 일본군이 지닌 소총은 연발사격이 가능했으며 사거리도 200m를 넘었다.

칼을 쓰는 싸움이라면 병력 수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지만 먼 거리에서 총을 쏴서 벌이는 전투는 무기의 성능에 우열이 가려지는 법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이 풍부했다. 이런 무기의 열세와 함께 의병들이 전투에 패한 또 다른 이유는 일본군의 협박이나 회유를 받은 밀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의병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일본군들에게 전해 일본군들이 의병들을 기습 공격할 수 있게끔 했다.

어쩔 수 없이 양상기는 의병부대를 해산한 후 전북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1909년 12월 20일 남원군 통한방(通漢坊)에서 일제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고 만다. 일제의 취조과정에서 양상기의병장은 전북을 잠복지로 택한 것에 대해 “전남 목포에 출(出)할 시(時)는 사람들이 많이 나를 알기 때문에 체포될 우려가 있다. 전북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는 고(故)로 전북으로 갔다” 고 말했다.

또 의병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인을 한국의 관리 또는 거류민으로 속속 들여보내 끝내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해 한국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고 밝혔다.

일제에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벌써 운명이 자(玆)에 지(至)한 바에는 사(死)를 결(決)하였다. 만약 생명에 이상이 없다면 다시 도당을 모아 폭거(暴擧)에 출(出)할 결심이라 한다”며 끝까지 일제에 맞서 싸울 뜻임을 당당하게 진술했다.

양상기 의병장은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사건’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대구공소원에 항소했지만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교수형을 선고했다. 1910년 8월 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선생은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 양진여의병장이 교수형을 당한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라를 위해 장한 삶을 살다가 같은 교수형장에서 순국한 것이다.



■서암로와 설죽로
 

부자의병장 표지석앞에선 생전의 양일룡씨

양진여·양상기 의병장의 우국충정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양진여 의병장의 손자인 양일룡씨가 1971년 우여곡절 끝에 부산교도소에서 보관돼 있던 ‘양진여 판결문’을 찾아내면서 부터다. 이 판결문은 1971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돼 관심을 모았다. 양진여 의병장에 대한 기록은 <판결문>(判決文)을 비롯<관보>(官報)나<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등에 담겨있다.

양일룡씨는 어렸을 때 할머니(박순덕여사)로부터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들이 일제에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이 된 후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10여년 세월동안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이 과거 재판을 받았던 광주지방검찰청과 대구고등검찰청 등 관계기관의 문서 창고를 뒤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해 실의에 빠져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부산교도소 문서고였는데 이곳에서 두 분의 판결문을 찾아냈다.

양일룡씨는 10여 년 전 세상을 떴다. 생전의 회고에 따르면 양씨의 할머니이자 양진여의병장의 아내인 박순덕 여사가 쑥대밭이 된 집안을 추슬러 왔다고 한다. 양일룡씨는 생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할머니 눈은 생 꼬막을 까놓은 것처럼 새빨갰는데 왜놈에게 붙잡혀 가서 눈에 고춧가루를 넣은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다”고 밝혔었다.

고 박순덕 여사는 남편과 큰아들이 교수형을 당하고, 둘째 아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고, 당신 역시 일제로부터 당한 고문으로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자식들을 돌보며 살았다는 것이다. 부자의병장의 뒤에는 남편과 아들을 잃고, 고문으로 폐인이 된 아들을 보살피며 살아온 한 여인의 기막힌 인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양일룡씨는 양상기의병장의 아내에 대해서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었다.

“저도 큰어머니를 뵙지는 못하고 할머니에게 듣기만 하였습니다. 큰아버님(양상기 의병장)이 왜놈들에게 붙잡혀 대구감옥소로 이송 갈 때 큰어머니 백씨가 지아비를 따라 영산포 나루까지 갔는데 그 길로 돌아오시지 않았답니다. 아마도 큰아버님이 자기는 죽을 테니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먼 곳에 가서 살라고 간곡하게 당부한 모양입니다.”
 

설죽로
서암로

정부는 1977년 의병장 서암(瑞菴) 양진여와 설죽(雪竹) 양상기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각각 수여했다. 양일룡씨는 1987년 4월, 광복회 전남 광주 연합지부의 명의로 할아버님 아호를 딴 ‘서암로(瑞庵路)’ 지정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광주광역시는 1992년 10월, 광주 서방 네거리에서 전대 네거리를 거쳐 동운고가까지를 ‘서암로’로 이름지었다. 또 양상기의병장을 기념하기 위해 신안 제1교에서 북구 일곡동까지 의 도로를 설죽로라 명명했다.

매월동 묘역과 서암로와 설죽로가 접하는 신안교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의 기개와 충혼을 만날 수 있다.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에 대한 연구는 광주 국제고등학교 수석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노성태 선생과 순천대 홍영기교수 등 많은 학자들이 벌이고 있다.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는 홍교수와 함께 호남의병을 비롯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에 대한 연구에 정성을 들이고 있는 분이 노성태 선생이다. 노선생은 각종 자료?문헌연구와 현장답사를 통해 <양진여부자의병장실기> 책을 펴내기도 했다.

노성태 선생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지역역사를 정리하고 탐구하는데 정열을 바치고 있는 분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연구한 내용들을 지역 언론에 게재해 정리한 뒤 <광주의 기억을 걷다>책자로 발간했다. 이외에도 <남도의 문화> <고등학생을 위한 역사도서 길라잡이> <독립의 기억을 걷다> <신한국통사>등 주옥같은 책들을 펴냈다.
 

양진여부자의병장실기

■호남의병과 호국의 가치

지금의 시대가치가 ‘민주’에 지나치게 편중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고 있는 역사적 가치가 호국의 가치다. 중국대륙과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그 수많은 호국영웅들에 대한 조명이 매우 미미하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해 농기구를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던 농민군과 의병에 대한 역사적 기념도 소홀하다.

호남은 임진·정유재란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곳이다. 구한말 의병 역시 마찬가지다. 광주·전남의 의병은 전국 의병의 절반을 차지했다. 1909년 작성된 일본군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3만8천592명의 의병이 있었는데 이중 1만7천579명이 전남에서 활동했었다.

그렇지만 양진여·양상기 부자의병장을 비롯 기우만, 김태원, 김율, 김용구, 이석용, 오성술, 심남일, 안규홍, 임창모, 전해산, 임학규, 강무경, 김경윤과 같은 의병장들을 아는 이가 드물다. 특히 학생들은 호남지역 의병과 만세운동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의병사를 널리 알려 청소년들의 애국·호국정신을 키우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도움말= 노성태, 김갑제, 정인서, 윤재득, 부자의병장기념사업회

사진제공= 광주광역시 서구청, 담양군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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