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94>-제7장 비겁한 군주

명종의 단명은 모후인 문정왕후의 모진 수렴청정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란 소문도 있었다.

<선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선조의 아명 하성군은 명종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나와있다.

명종은 여러 왕손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를 걱정했다. 병석의 그 앞에 어린 왕손들이 놀고 있었다. 하루는 “너희들의 머리가 누구 것이 큰가 알아보려고 하니 익선관(왕이 쓰는 정식 관모)을 써보라”고 했다. 그런데 가장 나이 어린 하성군이 익선관을 받아들고는 내팽개쳤다.

“이게 내 머리에 맞겠나이까? 작은 것 주소.”

하, 이것봐라. 병으로 빌빌하던 명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가장 어린이다운 말을 한 하성군의 순수한 영혼을 보고 그는 그가 커서도 저렇게 맑은 인물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병중에도 늘 그를 곁에 끼고 살았다. 몇 년 후 어느날 의식이 없어지고 숨이 넘어갈 즈음, 부랴부랴 달려온 영의정 이준경과 조정 신료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후사를 어떡하실려고 그러십니까.”

가는 것은 가더라도 후사 결정이 중요했다. 그러자 명종은 누운 채로 한 손으로 희미하게 병풍 안쪽을 가리키고는 숨을 거두었다. 하성군의 나이 14세때였다. 영의정 이준경은 명종의 손가락질이 병풍 안의 중전 인순왕후에게 물으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중전도 남편이 병중인 내내 하성군을 곁에 두었음을 알고 그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전은 후궁 중 드세지 않고 고분고분하고 착한 하성군의 모친을 생각했다. 친정도 보잘 것이 없어서 친정 식구들이 설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고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했고, 그 점은 조정 신료들도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인순왕후는 시어머니 문정왕후 등쌀에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살아왔던 왕비였다. 외척의 군림과 교만에 치를 떨었다. 일부 조정신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전의 권한 행사로 풍산도정 이종린,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인 등 왕자와 왕손 등 후보들이 즐비했지만, 하성군이 드디어 어린 나이에도 왕위에 올랐다. 겉으로는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지만, 하성군을 진짜로 총애한 사람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였다. 인순왕후에게 고분고분한 하성군의 어머니와의 사적인 인연도 그가 왕위에 오른 데 큰 힘이 되었다.

직계에서도 내놓을만한 군번이 아니고, 외척은 더더군다나 별 볼 일 없는 선조는 그 배경으로 어려서 왕위에 올랐지만 내내 주눅들어 살았고, 결단성이 부족해 무엇을 결정해도 주저하고 망설였으며, 의심이 많고 때로는 피해의식이 컸다.

이런 것을 저잣거리의 거렁뱅이들도 꿰뚫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궁궐의 정보에 꽤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여서 어쩌면 윤원형의 종자, 윤두수나 이산해가 밖에서 뿌려놓은 씨라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이봐 지금 세상이 극락이지 않냐. 들짐승처럼 아무데서나 남녀간에 교미하고, 먹고 싶은 것 남의 집에 들어가 실컷 훔쳐먹고, 입을 것도 신경쓸 것없고, 자는 것은 하늘이 이불이니 이게 무릉도원 아니냐구?”

“나두 좋아.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사대부들 물건도 동이 나는데, 그러면 우리의 재산도 줄어드니 그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다야.”

“상관하지마.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아.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별 미친 년 다보겠네. 물건 떨어지면 어떻게 입성을 하고 사냐.”

이런 난리에는 행세하던 자나 거렁뱅이나 누리는 것은 다를 것이 없었다. 재물과 보물을 몽땅 쌓아둔 것으로 소문난 한성판윤 홍여순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빼돌린 다음 질탕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다. 다른 건달들은 영의정 좌의정 집에 들이닥쳐서 값나가는 물건을 빼내 기생집에 갖다 바치고 욕망을 채우며 세월을 보냈다. 그것을 사람들은 무위도식이라고도 하고, 문자를 쓰는 사람들은 유유자적이라고 의미를 붙여주기도 했다. 그런 자들이 남산골, 사직골, 삼청골, 시구문 주변에 득시글거렸다. 거지떼들의 왕국이 된 것이다. 이러니 노예문서를 불질렀어도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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