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0. 일제가 망가뜨린 목포 유달산

유달산의 눈물 “일제의 난도질에 몸이 아파요”

유달산 능선 끊어 노적봉과 일등바위 사잇길 내고

곳곳에 불상·신사 세워 일본불교 포교…민족혼 압살

일등바위 쪽에 흥법대사·부동명왕 상 자리하고 있어

광복 73주년 되도록 일제잔재 그대로…정리 돼야
 

일본 불교 진언종 파는 1920년대 말 일본유달산에 88개의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있다.

 

■일제가 망가뜨린 목포 유달산

목포를 상징하는 것은 유달산이다. 유달산은 일제 강점기에 가수 이난영(李蘭影)이 부른 ‘목포의 눈물’ 배경이 된 곳이다. 목포 앞바다에 자리하고 있는 삼학도와 그 주변의 어선모습, 뱃사공 등의 바다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유달산이다. 유달산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의 풍경과 연인들의 이별을 빗대 망국의 한을 달랜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목포의 눈물’ 가사에는 삼학도와 노적봉(유달산), 영산강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삼학도와 노적봉(유달산), 영산강은 모두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섬이었던 삼학도는 매립이 돼 시가지로 변해버렸다. 노적봉 역시 유달산과 이어져 있던 지맥이 끊겨 저만큼 외롭게 자리하고 있다. 영산강은 하구언이 생기면서 겉모습은 물론이고 생태계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1960년대 유달산전경(혜인여고쪽에서 노적봉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유달산은 호국과 관련된 전설이 서린 산이다. 유달산 노적봉은 해발 60m의 높이로 솟아있는 커다란 바위 봉우리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기만전술용으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충무공은 유달산 서쪽의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군량미(軍糧米)를 쌓아놓은 큰 노적(露積)처럼 보이게 했다. 왜군들이 이를 보고 “저렇게 많은 군량을 쌓아두었으니 군사도 많겠다”며 도망쳤다고 한다.

이 노적봉은 원래 유달산 일등봉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일본인 거주지와 구 시가지를 연결하기 위해 새로 길을 내면서 유달산에서 떨어져 나온 모습이 돼버렸다. 일제가 신작로 건설을 이유로 두 동강 내버린 광주 성거산과 판박이다. 일설에는 일본인들이 유달산에서 뻗어내려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정기를 끊어버리기 위해 일부러 길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일등바위에 새겨진 일본불교의 상징인 홍법대사상(우측)과 부동명왕상(좌측)

일제는 노적봉에 담겨있는 ‘왜군 도주설’을 희석시키기 위해 지도나 문헌에 노적봉을 노인봉(老人峰)이나 노인암(老人岩)으로 표기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의 기지와 조선수군들의 불사항전의 정신이 담겨 있는 노적봉은, 힘없고 처량한 노인들의 신세를 상징하는 노인봉이라는 이름이 돼버렸다. 조선의 기를 어떻게든 죽이려 한 일제의 태도에 비춰보면 산허리에 도로를 만들어 맥을 끊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일제는 1920년대 유달산을 마구잡이로 훼손했다. 일본불교의 부흥을 위한다는 이유로 유달산 88곳에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 상을 설치했다. 현재는 유달산 일등바위 암벽에 조각된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만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유달산 곳곳에 이들의 상이 있었다. 일본 신사도 세워졌다. 일본 불교의 힘을 빌어 조선의 국운을 압도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

■유달산의 역사

목포문화원의 홈페이지에는 목포 유달산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목포시가의 뒤쪽에 우뚝 솟은 높이 228m의 유달산은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리며 제 멋대로 멋을 부린 기암괴석은 장관을 이루어 이 산을 오르지 않고는 목포에 들렸다고 말 할 수 없을 만큼 널리 알려진 산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달산은 봉수산이다. 다도해의 조망이 좋고, 지금은 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유달산에는 입구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비롯해 많은 바위와 누정, 문화유적, 전설, 사찰, 민속과 전시관 등이 시민의 쉼터로서 관광객과 등산객이 끊이지 않는다.
 

유달산부동명왕상

지형과 지세는 전 지역이 화강암으로 구성된 암반으로 이루어져 경사가 급한 편으로 경사도 30%이상이 62.3%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형표고는 해발 50m이하가 29.8%이고 200m이상은 0.4%의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식생으로는 대표수종이 곰솔이며 그밖에 아카시아나무, 오리나무가 있고 관목류로는 사스레피나무, 광대싸리, 조록싸리, 쪽제비싸리, 광나무, 사철나무, 개나리, 무궁화, 참빗살나무, 까치밥 나무 등이 분포하고 있으며, 넝쿨 식물로는 청미래 덩쿨, 바위손, 노박덩쿨 등이 분포하고 있다’

유달산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지금의 유달산의 한자표기는 ‘선비 유’(儒)자와 ‘이를 달’(達)자를 써서 儒達山으로 쓰고 있으나 옛날의 문헌에는 여러가지 표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楡(느릅나무 유)자를 써서 楡達山 이라 했다.<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에는 鍮(놋쇠 유)자를 써서 鍮達山, 혹은 鍮達烽燧라고 기록돼 있다.

1899년 간행된 <호남읍>에도 鍮達山으로 쓰여있다. <세종실록지리지>무안현의 관방조에는 鍮達伊(유달이)라는 이름도 나타난다. 楡나 鍮 대신 儒자를 사용해 儒達山이라 한 것은 무정 정만조(戊亭 鄭萬朝)가 진도로 유배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도로 갈 때 목포 일대 유생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유학을 진작시켜 이 지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 때를 전후로 해 鍮達山이 儒達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달산홍법대사상

일본인들이 1914년 간행한<木浦誌>에는 諭(깨우칠 유)가 사용돼 諭達山이라 적혀 있다. 이는 일본어의 발음에 따랐기 때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儒 한자의 일본발음이 쥬(じゅ)고 諭는 유(ゆ)이기 때문에 유달산의 우리 발음에 맞추느라고 諭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일본인이 지어 불렀던 <木浦行進曲>이나 <木浦小唄>에는 諭達(ゆだる :유달)이라고 표현돼 있다.

■목포의 역사

목포는 조선 세종대왕 이전만 하더라도 매우 한적한 어촌이었다. 불과 몇 백 명의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목포는 영산강 하구과 서남해안 바다를 모두 안고 있는 곳이어서 해상 요충지였다. 세종 때 들어와 목포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목포에 진(鎭)이 설치되는 배경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무안현(務安縣) 목포(木浦)와 보성현(寶城縣) 여도(呂島) 등은 모두 왜적이 드나드는 요해지(要害地)입니다. 그러나 병선(兵船)을 정박하여 세운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청하옵건대 목포와 여도에 따로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보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뒤 목포는 무관 종6품인 만호(萬戶)가 배치된 조선 수군의 진이 됐다. 목포진은 만호가 배치됐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목포진에 성이 축조된 것은 1501년(연산군 7년)이다. 수군이 있는 영(營)과 진(鎭)에는 군량과 군기를 쌓아 두고 해상방어와 수색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성이 없는 관계로 진을 지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목포진지>에 따르면 목포진에는 만호 1인 외에 군관(軍官) 6인, 진무(鎭撫) 7인, 사부(射夫) 2인, 사령(使令) 5인의 관원이 있었다. 만호는 인근 바다를 지키는 임무 외에도 진영 일대 마을의 일반 행정까지도 관할했다. 500여 년 동안 존속됐던 목포 진은 일제의 압력에 따라 목포개항 2년 전인 1895년 7월 16일 칙령 제141호로 폐진됐다.
 

폐진된 목포진(만호진)

목포진의 흔적은 만호동 일대 민가 돌담에서 어렴풋하게 찾을 수 있다. 1897년 개항 당시만 하더라도 목포 진 청사 일부가 남아있어 무안감리서와 일본 영사관, 해관으로 사용됐다. 진지가 있었던 자리에는 영국영사관기지가 들어섰는데 한일병합 이후에 민가들이 들어섰다. 이때 주민들은 성을 허물어 돌들을 집이나 담을 짓는데 사용했다.

목포 진 자리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만호동 제일성결교회 오르막 공터에 있는 목포진유적비(木浦鎭遺蹟碑)다. 그리고 일본영사관(현재의 목포문화원) 뒤뜰에 묻혀 있던 두 개의 석비가 목포진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목포개항령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목포는 일제의 식민기지로 전락했다. 목포항을 통해 호남곡창에서 생산된 쌀과 각종 곡식, 광주와 남평, 고하도에서 거둬들인 면화들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목포는 사실상 일본사람들의 차지가 됐다. 1898년부터 일본 규슈지방의 농어민들이 이주해 와 유달산 아래쪽 해안가를 매립해 땅을 만들어갔다.
 

목포 본정통 일본인 거리

지금의 용당동과 서산동과 만호동 일대 상당한 토지는 일본인들이 갯벌을 매립해 거주지로 만든 곳이다. 목포항과 가까운 유달동·만호동·행복동·상락동·영해동·측후동 일대에는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거류지가 만들어졌다. 항구에서 가깝고 경치도 좋은 유달산 주변에는 곳곳에 일본주택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기생집과 술집들도 들어섰다. 예전에 법원건물이 있었던 유달산 입구 쪽 구도심 일대에서는 일본식 주택을 쉽게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목포의 일본인마을

목포시는 일본영사관과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등을 목포근대역사관 1·2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의 잔재이니 없애버리자는 의견과 치욕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니 존치하자는 의견이 팽팽했으나 결국 보존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목포는 군산과 함께 일제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개항지 목포와 광주에 상륙한 일본불교

과거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를 건설하기에 앞서 항상 선교사와 포교사를 먼저 보냈다. 종교의 힘을 빌려 제국주의자들의 야욕을 달성키 위해서였다. 낯선 이방인들에 대한 거부감은 선교사와 포교사들이 전한 신앙에 의해 약화됐다. 종교는 식민지 국민들의 심리적 방어막을 무너뜨리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식민지 확보를 위해 선교사들을 먼저 파송했던 영국과 프랑스 등 제국주의 나라들처럼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1870년 정한론(征韓論:조선정벌론)이 들끓을 때 에도신페이(江藤新平)가 대외침략정책에 불교를 활용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일본 불교계는 이를 반겨 적극 호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조선의 국권 침탈에 앞서 종교인을 대거 조선으로 보냈다. 다음해인 1877년 일본 불교가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 불교정파는 정토진종 동본원사였다. 뒤이어 일연종, 정토종, 진언종, 조동종, 임제종 등 종파의 승려들이 조선으로 물밀듯 들어왔다. 정토진종은 10개 파가 있으며 이중 오타니파(大谷派:동본원사)와 혼파(本派:서본원사)가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오타니파에 소속된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과 히라노 게이스이(平野惠粹)는 1877년 10월 부산에서 포교를 시작했다. 서울 남산에서의 포교는 1890년에 시작했다. 오쿠무라 엔싱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을 적극적으로 도운 오쿠무라 조신(奧村淨信)의 7대손이다. 오쿠무라 엔싱이 부산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인물 중의 하나가 전라남도 초대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를 지낸 친일파 윤웅렬이다.

엔싱은 1877년에 부산에 교토(京都) 본원사(本願寺) 분원을 세우고 조선정객들을 친일파로 만드는 근거지로 삼았다. 엔싱은 선진문물 견학을 명목으로 해 개화파 인물들을 일본으로 보내 친일인사로 만들었다. 엔싱은 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아 조선의 유력 정객들과 교류를 가졌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대신들이 엔싱과 교류를 나눈 인물들이다. 윤웅렬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엔싱이 동래 본원사에 있을 때 윤웅렬은 동래의 관직에 있었다. 이 때 윤웅렬이 자객에게 쫓기는 일이 있었다. 윤웅렬이 피할 곳을 찾을 때 그를 숨겨준 사람이 엔싱이었다. 윤웅렬은 1896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른 13도제 시행으로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눠지자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엔싱이 1897년 목포개항 직후 광주로 진출해 윤웅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광주에 정착하게 된다.

엔싱이 광주를 찾은 명분은 일본불교 포교를 위한 본원사 분원 건립이었다. 그러나 실제 꿍꿍이는 일본인들이 광주에 정착할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광주는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커 일본인들이 집을 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엔싱의 거듭되는 요청에 결국 윤웅렬은 서문 밖(지금의 광주시 동구 불로동 1번지 일대)에 땅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엔싱이 광주에 근거지를 마련하자 엔싱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일본에서 목포를 거쳐 광주로 건너왔다. 이오코는 곧 둘째 딸 미츠코와 사위 세쓰타로를 광주로 불러들여 실업학교를 세웠다. 차츰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광주천변 보작촌(洑作村)일대에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술집들이 생겨났다. 이 보작촌 유흥업소들은 나중에 황금동 일대 집창촌과 술집들로 이어졌다.

■유달산에 88개 불상 세운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

정토진종 동본원사는 목포에 별원을 세우고 포교에 나섰다. 교토에 있는 도지(東寺)가 본산인 진언종도 목포에 승려들을 보내 교세확장을 시도했다. 일본 불교 7개 종파가 개항지인 목포에 진출해 일제 조선침략의 전위 병 역할을 맡았다. 진언종 파는 일본불교의 부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1920년대 말 일본유달산에 88개의 홍법대사(弘法大師)상과 부동명왕(不動明王)상을 만들었다.

일본 진언종 창시자인 홍법대사 구카이(空海)는 당나라에서 수행 후 일본에 불법(佛法)을 전했다. 일본 각지에 88개의 사찰을 세우고 일본불교의 진흥시켰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진언종 승려들은 유달산에도 88개의 작은 불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유달산 입구에서부터 이등봉, 일등봉 등지에 불상을 세웠다. 그러나 거의 없어지고 지금은 일등바위에 조각된 흥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만 남아있다. 일본인들이 유달산에 세운 신사도 흔적만 남아있다.
 

유달산신사

진언종은 일본 헤이안(平安 : 784-1185)시대에 티베트와 네팔 등지를 통해 일본에 전파된 밀교(비밀불교)의 한 형식이다. 비로사나불을 본존불로 삼고 있다.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사자로 오대명왕 중 한명으로 밀교도들이 숭상하는 명왕이다. 부동명왕은 부동여래사자라고도 불린다. 원래 명왕들은 인도의 토착 종교의 신들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언종을 연 홍법대사가 죽자 추종하는 이들이 부동명왕을 흥법대사상 옆에 둠으로써 흥법대사를 수호하는 명왕으로 전락돼 버렸다. 홍법 대사를 수호하는 신이 돼버린 것이다. 이런 연유로 흥법대사 상 옆에는 항상 부동명왕상이 있다고 한다. 부동명왕은 악귀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해 분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형상이다. 눈을 부릅뜨고 철퇴를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한다.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진언종 승려들이 유달산 바위에 새겨 넣은 부동명왕상은 조선인들에게 극심한 두려움을 갖게 했을 것이다. 철퇴를 들고 있는 부동명왕은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든지 목숨을 빼앗아갈 수 있다고 협박하는 일본 헌병과 경찰의 모습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작가도 어린 시절 유달산 일등바위를 오르내릴 때마다 이 부동명왕 상을 보고 겁에 질리곤 했다. 그 때는 부동명왕상이 일본 불교가 숭상하는 신인지는 몰랐다. 왜 저렇게 무서운 표정일까? 그런 생각만 들었다.

■홍법대사상·부동명왕상 철거 논란

2018년 8월 15일은 광복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풀려난 지 73년이 지났지만 목포 유달산에는 일본불교의 잔재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흥법대사상은 노적봉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험상궂게 생긴 부동명왕상은 북항과 목포 시청사 쪽을 노려보고 있다.

그런 부동명왕상을 보면 매우 기분이 언짢아진다. 일본 불교를 통해 조선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그 이후에는 총칼로 조선을 지배했던 일제의 조선침략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에 일본불교가 숭상하는 승려와 불상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목포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하다.

부동명왕상이 어떤 이유로 유달산에 세워져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의 국토유린에 대한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은 우리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홍법대사가 누구인지를 모르기에 흥법대사상 앞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불공을 드리는 시민들의 모습도 가끔 눈에 띤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광주공원에 있는 윤웅렬 선정비

목포시민들 사이에서는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 철거를 놓고 의견이 반반이다. 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은 “일본 승려와 일본불교가 숭상하는 신상을 광복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두고 있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다”고 말하고 있다. 유달산의 코 부분에 해당되는 일등봉 암벽에 일본불교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은 민족정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후세들에게 경계의 본으로 삼고자 한다면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그대로 떼어내 다른 곳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이고 있다.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은 지난 1995년 철거될 뻔했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 일환으로 시가 철거를 추진했으나 공사를 맡은 인부가 혹시나 해코지를 당할까봐 망설이다가 결국 철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목포시는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 상을 역사교육자원으로 활용하기위해 시 문화유산 지정을 논의했으나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대립이 매우 컸다. 결국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에 대한 시 문화유산 지정은 무산됐다. 지금은 가타부타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방치돼 있다.
 

윤웅렬가족. 앉아있는 이가 윤웅렬이고 서있는 이가 아들 윤치호다.

시민들 중 일부는 존치를 주장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해 빼앗겼던 역사의 교훈을 새기는 장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목포시는 수년전 시민들을 상대로 철거와 존치를 놓고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의견이 반반이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개선이 필요하다. 일제가 훼손한 유달산을 저 상태로 놓아두는 것 자체가 굴욕이고 수치이기 때문이다.

사실 목포 유달산의 경우처럼 일제 잔재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윤웅렬의 선정비(觀察使尹公雄烈善政碑)는 광주공원에 세워져 있다. 윤웅렬 선정비 옆에는 이근호 선정비가 있다. 이근호 역시 전라남도 관찰사를 거쳐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낸 친일파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1910년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남작 작위와 2만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그런데 윤웅렬과 이근호의 비가 에워싸고 있는 비가 임진왜란 때 의병과 함께 왜군과 싸운 권율장군의 창의비다. 임진·정유왜란 7년 간 조선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의 창의비를 일제 앞잡이들의 선정비와 같은 곳에 두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민족의식이고 역사의식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윤여환교수의 논개표준영정

어디 그 뿐인가? 우리가 흔히 대하는 성웅 이순신장군의 영정은 친일작가인 이당(以堂)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것이다. 김은호는 논개영정과 춘향영정을 그린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논개와 춘향을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해 그리는 바람에 논개와 춘향의 체형과 얼굴이 거의 비슷하다.

김은호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충성한 화백이었다. 그는 1937년에 일제에 ‘금차봉납도’라는 그림을 바쳤다. 이 그림은 일제가 시작한 태평양전쟁을 위해 조선여성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내용이다. 그는 황국신민화에 앞장섰으며 일제승리를 위한 국방기금마련 전시회도 열었었다.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논개영정은 화순 충의사에도 있다. 지난 2004년에 건립된 충의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최경회 의병장을 모시고 있다. 충의사에는 최경회장군의 부인인 논개를 기리고 있는 의암영각(義岩影閣)이 있다. 그런데 의암영각에는 논개의 영정이 두 개 걸려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김은호의 작품이다.
 

왼쪽이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이며 오른쪽은 윤여환교수의 ‘표준논개영정’

해남 대흥사에 있는 백설당의 현판은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것이다. 김성근은 구한말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해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직위를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이 올라있다. 이런 친일의 잔재들을 그대로 놔둔 채 맞는 제73주년 광복절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해남 대흥사 백설당 현판(김성근 글씨)

도움말/김지민, 이해준, 이난희, 정만진, 목포대학교 박물관

사진제공/류기영, 전남도 남도여행 기자단, 목포시, 목포문화원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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