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채 남도일보 동부본부 취재국장의 ‘순천만에서’
바다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비극을 줄 뿐이다

2017년 12월 3일 오전 6시께 336t급 급유선 명진 15호는 13노트로 바다를 달렸다. 시속 24㎞에 해당한다. 인천항을 출발해 영흥도를 가기 위해 시화 방조제 앞바다를 지날 때 속도는 10노트였다. 물 밑에 암초가 널려 있는 협수로에서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그 시간 낚시어선이 자주 오가는 곳이다. 급유선 선장은 오른쪽 앞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9.77톤급 낚시어선 선창 1호(승선 22명 )를 발견했다. 낚시어선 속도는 10노트. 이대로 가면 저 배를 따라잡아 충돌한다. 하지만 급유선 선장은 그때 ‘알아서 피해가겠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낚시어선에서 급유선 불빛을 처음 본 건 갑판에 있던 몇 사람이었다. 선내에선 보지 못했다. 그들이 불빛을 본 지 1분 뒤 충돌했다. 생존자는 “암흑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나 선미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갑판 승객은 튕겨나갔고 선내 승객들은 바다에 갇혔다. 검은 바다로 사라진 낚시어선 선장은 이틀 뒤 파도에 쓸려온 갯벌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9.77t과 336t. 낚시어선과 급유선은 34배 차이였다. 급유선 선장에게 직업윤리가 있었다면 낚시어선을 본 순간 속도를 줄였을 것이고 15명을 바다로 몰아넣지 않았을 것이다.

15명의 사망자와 7명의 부상자를 낸 선창1호는 좁은 수로에서 작은 배가 큰 배의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좁은 수로 항법’을 지키지 않았다. 충돌한 급유선도 낚시어선을 발견하고도 충돌을 막기 위한 감속이나 항로변경 등 사고 방지를 위한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2018년 1월 11일 오전 5시께 경남 통영시 욕지도 남쪽 약 80㎞ 해상에서 여수 선적 9.77t급 낚시어선 무적호(승선 14명)가 파나마 선적 3천t급 가스 운반선 코에타와 충돌해 전복되면서 4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다.

해당 어선들의 안일한 안전 의식이 인명사고를 불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서로의 위치를 알아 피할 시간이 충분했던 두 어선이 충돌 직전까지 속도만 늦출 뿐 적극적으로 항로 변경을 하지 않은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두 선박 승선원들 진술과 화물선 항해기록장치(VDR)를 통해 확인됐다.

즉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운항하던 화물선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던 무적호를 3마일(4.8㎞) 떨어진 곳에서 인지했음에도 회피기동을 하지 않다. 가스 운반선의 필리핀인 당직 사관은 사고 후 경찰에 “(상대) 어선이 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무적호 역시 육안으로 기스 운반선을 인식하고도 속도만 약간 늦췄을 뿐 항로를 따로 바꾸지 않았다. 두 배 모두 충분히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으면서도 서로 충돌 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고 ‘알아서 피해가겠지’라는 안이한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불과 1년 1개월 전 급유선이 낚시어선을 들이받아 15명이 숨진 인천 영흥도 참사와 유사한 사고가 되풀이 됐다.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알아서 피해 가겠지’란 말을 되새겼다. 무서운 말이다. 트럭 운전자가 승용차에, 승용차 운전자가 이륜차에, 이륜차 운전자가 행인에게 흔히 하는 생각 아닐까. 고속도로에서 굉음을 울리며 끼어드는 질주 트럭을 만날 때마다 ‘죽기 싫으면 비켜’ 하는 운전자의 고함을 환청처럼 듣는다. 뭍이든 바다든 교통의 기초 윤리는 ‘강자의 약자 배려’다.

해상낚시가 인기를 끌면서 바다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 낚시어선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해상낚시는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대상으로 즐기는 레저이기 때문에 자칫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즐거운 해상낚시를 위해서는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투철한 안전의식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철저한 선박 점검과 구명조끼 등 안전장비 착용은 기본중에 기본이다.

옛날부터 뱃사람들은 ‘발밑이 바로 저승’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바다는 준비된 자에게 추억을 선물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비극을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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