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풂·孝와 愛·학문 정진 정신이 배어 있는 쌍산재

전라도역사이야기-76.아름다운 고택(古宅), 구례 쌍산재(雙山齋)
베풂·孝와 愛·학문 정진 정신이 배어 있는 쌍산재
지리산·섬진강 품은 구례 마산 사도리에 위치
세 번 크게 놀라고, 열 번은 탄성 짓는 古宅
6대조 오현우 선생 터 잡은 뒤 200여년 풍상
살림·정원·배움 공간 제각각, 기품·조화미 넘쳐
돌계단·연못·영벽문 뒤 저수지 등 볼거리 가득
내부 공사 후 한옥체험시설, 멋진 하룻밤 가능
 

쌍산재 입구.

지리산은 넓고도 깊은 산이다. 남도 땅 가운데 자리 잡은 지리산은 몸집이 크다. 부려 놓은 몸이 수천 갈래로 뻗어있다. 큰 봉우리는 큰 봉우리대로, 작은 봉우리는 작은 봉우리대로 계곡을 만들고 그 계곡에서 흘러가는 물들은 평야를 살찌게 했다. 깊은 산에는 몸에 좋은 약초들이 가득했고 산자락에는 과실들이 풍성했다. 게다가 산 아래 남쪽 동네들은 남해바다로 가는 길도 쉬어 먼 곳으로 오가기도 좋았다.

자연 예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살 수밖에 없다. 넉넉한 자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니, 지리산 녘 사람들의 품성은 대부분 인자하다. 없는 이들은 없는 대로, 있는 이들은 있는 대로 규모에 맞춰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모두 자연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집을 지으려면 모든 것을 밀어버린다. 철근콘크리트 세우고 한두 달 걸쳐 뚝딱뚝딱 세우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옛사람들은 자연을 그대로 두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았다. ‘들어가 사는 것’이었지, ‘내 마음대로 꾸미는 것’이 아니었다. 돌 하나도 허투루 내치지 않았다. 큰 돌은 초석(礎石)을 삼고, 작은 돌은 디딤돌로 삼았다.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대로,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두어 저마다 잘 살게끔 했다. 집안으로 실개천이 흘러내리면 막지를 않았다. 개천 위에 구멍 낸 담장을 세워, 물을 마중하고 배웅했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집에는 해치는 것이 없다. 사는 이나 보는 이나 평안하다. 조화의 미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 사람들은 불편한 것을 못 견뎌한다. 세상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길을 막는 나무는 베어버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물길이 있으며 메꿔버린다. 그리고 나무와 돌로 멋진 집을 삼는 것이 아니라 통유리와 멋진 디자인으로 멋을 부린다. 인공미다. 편하고 보기 좋은 인공미에 익숙하다 보니 그 많던 지리산 옛집들은 온대 간 데가 없다.

지리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구례에는 유명한 옛집 세 채가 있다. 쌍산재(雙山齋)와 운조루(雲鳥樓), 곡전재(穀田齋)다. 사람들은 이 집들을 구례 3대 고택(古宅)이라 부른다. 운조루는 널리 알려졌지만 쌍산재와 곡전재는 좀 생소하다. 쌍산재는 6대(代)에 걸쳐 살아온 집이다. 정확한 햇수는 헤아리기 힘드나 200여년 정도 된 고옥이라 생각된다. 쌍산재는 지금 시대의 화두인 상생과 조화, 혁신이 깃들어있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깊은 맛이 있는 집이 쌍산재다. 쌍산재는 살림집과 서당, 별서정원(別墅庭園)이라는 공간을 모두 갖추고 있다. 별서정원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만들고자 하나 최대한 자연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성한 공간을 뜻한다.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경외가 살아있는 곳이다. 과거, 세속의 번잡함과 권력 다툼에 지친 이들은 전원이나 산속 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별서정원은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 생활을 즐기던 곳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정원은 담양 소쇄원을 비롯 완도 보길도 부용동정원, 강진의 다산초당정원과 백운동정원 등이다. 쌍산재는 그 기본이 살림집이라는 점에서 별서정원과는 좀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살림공간을 벗어난 곳은 분명히 별서정원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는 쌍산재가 살림집이라는 기능과 강연장·휴식처 기능을 모두 갖춘 공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현실과 이상이 골고루 갖춰진 공간미학(空間美學)의 본산중 하나다.

■쌍산재 주거공간(상생)
 

쌍산재 안내도

쌍산재는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 632번지에 있다. 지리산을 배산(背山)으로, 섬진강을 임수(臨水) 삼아 들어서 있는 쌍산재는 구경하는 사람들을 수십 번이나 놀라게 한다. ‘수십 번’은 좀 과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세 번은 꼭 놀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쌍산재 정문을 들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아담하면서도 예쁜 풍경에 놀라게 된다. 첫 번째 놀람이다. 아담한 공간에 안채와 사랑채, 건너채 등 아담한 한옥 건물들이 마당을 중심으로 늘어서 다소곳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건물들은 의젓하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선 이의 시선을 부끄럽게 여기는 새색시처럼 수줍은 듯 자리하고 있다. 가옥들은 마당을 경계삼아 분명하게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나무 숲을 뒤쪽 받침으로 삼고 있는 안채는 중후하다. 안채 곁에는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다. 살림을 총괄하는 안채 마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영향력이 배어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눈요기 감이지만 예전에는 항아리 수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사랑채와 건너채는 소담하다. 한옥 구석구석에는 손만 뻗으면 쉽게 닿는 자리에 돌확과 소쿠리, 키, 다듬돌, 쟁기 등 전통 생활도구들이 놓여있다. 예전에는 생활필수 도구였지만, 지금은 고택의 운치를 살려주는 소품(小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집안에 응당 있어야 할 우물이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쌍산재 바깥 주차장에서 볼 수 있었던 우물이 바로 쌍산재 집안에 있던 우물이었다. 우물 이름은 당몰샘이다.
 

쌍산재 당몰

이 당몰샘은 원래 사랑채 앞쪽에 있었다. 우물 밖으로 집 담장이 쳐져 있었다. 그런데 이 당몰샘이 약천(藥泉)이었다. 지리산에 있는 온갖 약초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흘러가다 당몰에서 솟구치기에 이 우물물은 신비한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우물에는 지붕이 씌워져 있고 지존지미(支存至味)라는 현판까지 달려있다. 최고의 맛을 지닌 우물이라는 뜻이다.

우물 뒤쪽 담장에는 ‘천년고리감로영천(千年古里 甘露靈泉:천년마을에 이슬처럼 달콤하고 신령스러운 샘)’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이 박혀 있다. 쌍산재가 있는 상사마을 사람들의 당몰샘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쌍산재를 찾은 날에도 마을 사람 한명이 바가지로 당몰샘물을 떠서 마시고 있었다. 당몰샘은 물맛이 좋으면서도 수질조사에서도 위생상태가 매우 좋다. 2004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 10대 약수터 중 하나로 지정했다.

물맛이 좋을뿐더러 건강에도 효과가 커 이웃들은 이 당몰샘물 마시기를 즐겨했다. 집안에 있는 샘물을 길어가기 위해 이웃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길게 줄을 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쌍산재 주인은 이웃들이 쉽게 물을 길어갈 수 있도록 담을 허물었다. 그리고 우물이 집 밖에 있을 수 있도록 다시 담장을 쌓았다. 수시로 물을 길어 써야 했던 쌍산댁 여인네들에게는 분명 몹시도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원주인(原住人) 해주(海州) 오씨(吳氏) 가문 오현우(吳顯禹) 선생은 지금의 쌍산재 주인장인 오경영씨의 6대조이다. 오현우 선생은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학문에 대한 정진, 이웃에 대한 돌봄을 매우 중요시했다. 쌍산재라는 이름은 오현우 선생의 아들이자 오경영씨의 5대 조상인 오형순 선생의 호를 딴 것이다. 오형순 선생은 학문이 깊어 책 읽기를 즐겨하던 분이셨다. 후손들은 ‘쌍산 어른이 책을 읽던 서재’라는 뜻에서 쌍산재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쌍산재는 후손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장소인 동시에 효와 형제애, 긍휼의 가르침을 배우는 곳이었다.

해주(海州) 오씨(吳氏) 집성촌인 상사마을이 생겨난 것은 대략 신라 말로 추정된다. 상사마을이 생겨난 유례는 도선국사의 탑비인 백계산 옥룡사 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 玉龍寺 贈諡先覺國師碑銘)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도선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스님이다.

‘지리산 암자에 있던 승려 도선(道詵:827~898)에게 어느 날 한 기인이 찾아왔다. 그는 도선에게 제가 수백 년 동안 물외(物外)에 숨어서 살아왔는데 제게 조그마한 기술이 있습니다. 덕이 높은 스님께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면 다른 날 뵙기를 청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도선이 이를 기이히 여겨 다른 날 약속 장소로 찾아가 그를 만났는데 그가 모래를 끌어모아 산천에 대한 순역(順逆)의 형세를 그려 보여주었다. 이것이 일명 삼국도(三國圖)로 삼국통일의 징조를 암시해 준 것이다.’

도선국사비문에 따르면 도선이 기인을 통해 왕건의 삼국통일에 대한 하늘의 계시를 받은 곳이 바로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던 마을’이라는 뜻의 ‘사도리(沙圖里)’였다. 이 사도리가 후에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눠지면서 각각 상사리(上沙里)와 하사리(下沙里)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상사마을은 대단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마을이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이 제시된 곳이기에 마을사람들 간의 따뜻한 모둠살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쌍산재 내실풍경

지리산이라는 깊은 산이 있기에 구례는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많은 비극이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6·25전쟁을 전후로 해 지리산 일대에 빨치산이 준동했다. 밤에는 빨치산 세상이었다. 빨치산과 경찰들 사이의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지주(地主)라 생각되는 집은 피해가 컸다. 빨치산들은 부잣집 주인들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그 험난했던 세월 가운데에서도 쌍산재는 제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는 쌍산재 집안의 베풂 때문이었다. 쌍산재에는 마을사람들이 언제나 와서 사용할 수 있는 뒤주가 있었다. 상사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은 식량이 떨어지면 쌍산재 뒤주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쌀과 보리를 꺼내갔다. 보릿고개를 그렇게 넘겼다. 그런 다음 다음해 농사를 지어 빌려간만큼 쌀과 보리를 뒤주에 다시 채워 넣었다. 운조루에서 볼 수 있는 타인능해(他人能解: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다)의 뒤주가 쌍산재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쌍산재의 살림이 넉넉해서 이웃들이 사용할 수 있는 뒤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쌍산재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며 베풀었다. 쌍산재 사람들 역시 보릿고개를 겪었다. 다름 사람들처럼 그리 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쌍산재 사람들은 쌀이 부족해 보리밥을 지었는데 집안 어르신과 집안 일꾼들을 위해 솥에 쌀 한 종지를 꼭 넣어 밥을 지었다고 한다.

보리밥과 함께 지어진 쌀밥은 조부모님께 올렸고 남은 쌀밥은 집안 일꾼들에게 건네졌다고 한다. 그런 다음 쌀밥이 조금 남으면 보리밥과 골고루 섞어 집안사람들이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쌍산재의 살림공간을 단순히 아름답고 예쁜 공간만으로 볼일이 아니다.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또 아랫사람들의 곤궁함을 헤아려 배려하는 정신이 배어있는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벽에 걸려 있는 소쿠리와 마당의 돌확들이 더욱 정겨워 보이는 이유다.
 

돌확 등 생활도구.

쌍산재는 또한 조선인의 기개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쌍산재 오씨들은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쌍산재 뒤채의 대나무들이 새삼 다시 바라봐진다. 이름 바꾸기를 강요하는 일본 순사와 헌병들의 득달을 견뎌내는 것이 어디 쉬었겠는가? 한바탕 곤욕을 치를 때마다 쌍산재 남정네들은 웅혼한 지리산의 봉우리와 그 기슭에 뿌리내린 대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쌍산재의 마당과 대나무밭이 유달리 커 보인다.

■빛과 남색(藍色)의 향연장인 쌍산재 돌계단
 

내실에서 정원으로 오르는 계단.

쌍산재를 처음 찾은 방문객들은 내실과 사랑채 등을 구경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언뜻 보아서는 다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장의 안내를 받아 장독대로 향하면서 탄성을 지르게 된다. 장독대에서 위쪽으로 향해있는 아름다운 계단 때문이다. 계단은 40여m 정도 길이다. 30도 정도의 경사를 지녔는데 돌계단이 비교적 낮은 편이어서 오르기가 힘들지 않다.

계단의 초입 좌측에는 별채가 자리하고 있다. 별채가 끝나는 부분부터는 대나무와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 터널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이다. 계단은 울울한 대나무 숲에 덮여 전체적으로 어둡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눈부시도록 환하다. 계단은 빛의 통로다. 바람에 대나무 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기분을 좋게 해준다. 적당한 걸음으로 차츰 명도(明度)가 더해지는 햇빛 쪽으로 걷는 상황이 좋다.

계단 중간쯤 좌측에는 호서정(壺西亭)이 방문객들을 반기고 있다. 호서정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정자인데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사방이 확 트여있는 구조다. 호서정은 3층 석축에 놓여 있다. 응달진 쪽의 석축에는 이끼가 가득하다. 소슬한 대나무밭 바람소리와 함께 하니 더욱 운치가 있다. 돌계단에 잔뜩 끼어있는 녹색의 이끼는 호서정 뒤쪽 남색(藍色)의 대나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돌계단 옆 호서정의 풍경은 녹색의 농담(濃淡)이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한 폭의 동양화다. 또한 빛의 향연장이기도 하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어두운 무대나 화면이 점차 밝아지는 페이드 인(fade-in) 느낌을 이곳에서 만끽할 수 있다. 밝은 출구가 바로 앞에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계단 중간에서 느끼는 폐쇄감은 부담감이 없다. 오히려 안온하다. 하늘을 가리고 있는 대나무 숲의 울창함은 한편으로는 터널을 빠져나올 때의 해방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무대 장치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계단을 다 올라,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런 설렘이 가득하다. 만약 쌍산재 방문에 동행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먼저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가서 계단 끝에 서있도록 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10여m 떨어진 어두운 계단 쪽에서 빛 속으로 나간 그 사람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역광 아래, 휘황한 실루엣에 휩싸인 그 사람은 그 어떤 남자나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각인될 것이다.

■쌍산재의 효애(孝愛)공간(조화와 신독)
 

쌍산재에 걸려 있는 현판.

계단을 올라 대숲 끝에 서면 갑자기 풍경이 변한다. 계단 끝에서 활짝 열려 있는 하늘이 보인다. 그다음 두 발걸음만 떼면 눈앞에는 넓디넓은 정원이 느닷없이 품으로 달려든다. 방문객이 어김없이 두 번째 탄성을 지르는 곳이다. 정원은 2천여 평이 넘는 넓이다. 돌계단 너머의 정원에는 잔디밭과 가정문, 쌍산재, 연못, 경암당, 영벽문 등이 차례로, 혹은 어울려 있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잔디밭은 예전에는 텃밭이었다고 한다. 쌍산재 주인장이 건물 내부를 손봐 한옥체험시설로 이용토록 한 뒤 숙박객들을 위해 산보 장소로 바꿨다. 잔디밭은 축구장 규격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다. 잔디에서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여간이 아닐 듯싶다. 잔디밭에서 서당채는 바로 보이지 않는다. 서당채는 가정문 뒤쪽에 숨어있는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뒤늦게 지어진 잔디밭 너머 왼쪽의 경암당이 마치 제가 주인인양 까치발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원 잔디밭과 경암당

쌍산재로 들어서려면 가정문(嘉貞門)을 통과해야 한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이후로 수십 번의 작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온갖 화초들이 저마다 예쁘고 단아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겨울철 스산한 날씨에 맞이한 화초들이지만 생기가 넘쳤다. 봄, 여름철, 저들은 얼마나 고울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정문에서 쌍산재까지는 불과 30여m에 불과한데도 좌우로 늘어선 나무와 돌 구경을 하다 보면 한참이 걸린다.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이 따로 없다.

정원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대신 단아하다.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쪽진 여인의 모습 같다. 정갈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정원에 이런저런 꽃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정원의 주인들이 부모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정원 곳곳에 약용식물을 많이 심었기 때문이다. 쌍산재 정원에 작약과 모과, 산수유, 매화, 결명자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들의 따뜻한 마음이 절로 느껴진다.

쌍산재에 거의 다다르면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절로 머리를 숙여 그 아래를 지나쳐야 한다. 머리를 숙이는 순간 쌍산재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들보와 서까래, 회칠한 흰 벽이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선비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쌍산재는 내실과 정자, 정원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쌍산재는 집안의 자제들이 학문을 배웠던 곳이다. 서당채이다.
 

휘어진 동백나무.

이 건물에는 쌍산재 현판과 함께 사락당(四樂堂), 염수실(念修室)이라는 현판들이 걸려 있다. 사락(四樂)은 당시 원주인에게 사형제가 있었는데 이 형제들이 모두 우애하면서 행복하게 함께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염수(念修)는 조상의 음덕을 잊지 말고 덕을 잘 닦으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의 ‘무념이조 율수궐덕(無念爾祖 聿修厥德:조상 잊지 말고 그 덕을 잘 닦고)/영언배명 자구다복(永言配命 自求多福:길이길이 하늘의 뜻에 따라 스스로 복을 구하라’는 글귀에서 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쌍산재 현판에는 오씨 집안사람들의 가르침과 정신이 담겨 있다. 집안 어르신을 존중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이웃에게 덕 베풀기를 힘쓰라는 유지(遺志)가 현판들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오씨 집 안 사람들은 조상들의 가르침을 잘 실천했던 것 같다. 그 험했던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쌍산재의 그 숱한 건물들이 온전히 남아있고, 그 후손들이 조상들의 말씀을 가슴속에 잘 품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현재의 쌍산재 주인장인 오경영씨만 하더라도 온후한 모습으로 조상들의 가르침을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있다. 부모 공경과 형제 우애, 이웃사랑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맛있는 차 한 잔을 건네며 넌지시 알리고 있다. 쌍산재에 돌과 대나무가 많은 것은 이곳 주인장들이 곧은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경암당과 연못(청원당).

쌍산재 건물 옆에는 청원당(淸遠塘)이라는 연못이 있다. ‘청원당’ 글자가 새겨진 비석에는 ‘獨行不愧影(독행불괴영), 獨寢不愧衾(독침불괴금)’이 새겨져 있다. ‘혼자 걸어 다녀도 내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잠을 자도 이불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집안사람들이 얼마나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도 행동과 생각을 바르게 함)에 유의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영벽문 밖의 놀라운 풍경(혁신)
 

영벽문.

청원당을 빙 돌아 나서면 경암당(絅菴堂)이 있다.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서당을 운영했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여기서 방문객들은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 놀람은 경암당 왼편의 영벽문(暎碧門)을 열면 펼쳐지는 광경 때문이다. 쌍산재를 안내했던 구례군 문화해설가 임세웅씨는 영벽문 앞에서 작가를 멈춰 세우고 뒤돌아 서기를 청했다. 임씨가 이제 돌아서도 좋다고 말하는 순간 작가는 눈을 의심했다. 느닷없이 문 밖에 비취색의 물이 가득한 호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호수’는 실은 사도저수지다. 사도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사도마을 일대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농업용수 저수지라는 본래의 취지와 상관없이 사도저수지는 쌍산재의 운치를 더해주는 뒷마당 큰 호수 역할을 하고 있다. 사도저수지는 제법 크다. 이른 새벽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해질 녘 금빛처럼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걷는 것도 큰 기쁨이다.
 

사도저수지.

쌍산재는 지난 2004년에 개방됐다. 전남도 지정 민간정원 5호로 지정돼 있다. 알음알음으로 쌍산재를 찾아온 이들이 “잠시 머물다 가기에는 너무도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어떻게 하룻밤을 잘 수 없겠느냐”고 물어오는 이도 많았다. 주인장인 오경영씨는 내부시설을 개선해 방문객들이 편안하게 하룻밤을 잘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쌍산재 한옥에서 잠시 차 한 잔이라도 마시고 가면 좋겠다”는 말에 방문객들이 원하면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있다.

쌍산재 취재를 하던 날, 오경영씨가 머물고 있는 내실에서 오씨가 내온 커피를 마셨다. 내린 커피의 향이 진하다. 오씨가 맛이 좋은 커피라고 말했다. 향이 진하면서도 맛은 부드러운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이 너무도 고요하다. 창밖 풍경은 다름 아닌 쌍산재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마당의 모습이다. 내실의 풍경 역시 밖의 풍경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창을 크게 낸 탓에 불을 켜놓고 있지 않아도 적당하게 밝고 적당하게 어둡다.
 

오경영씨와 구례군청 김인호씨, 문화해설사 임세웅씨.

창 곁에는 풍금과 소탁자, 재봉틀이 자리하고 있다. 풍금 앞에는 둘이서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다. 때때로 그 의자는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자리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풍금 옆에는 색소폰이 놓여 있다. 주인장은 몇 년 전부터 순천 시내로 나가 색소폰 연주를 배우고 있다. 따뜻한 마음이 깃 들여져 있는 한옥과 돌멩이 하나, 나무 한그루까지 정성으로 다듬어져 있는 정원, 그리고 멋있는 주인장까지…쌍산재, 참으로 멋있는 곳이다.
 

영벽문 너머의 저수지.

도움말/오경영, 임세웅, 김인호, 임세웅
사진제공/위직량, 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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