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현 가맥 독립·민주화 헌신 ‘주목’

해공 신익희와 정치인 송원영과 사돈지간

며느리 신정완 남편, 김재호와 일제 항거

김복현과 사돈지간인 신익회(앞줄 왼쪽 첫번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당시 모습이다. 김복현의 며느리 신정완은 신익회의 딸이다.
김복현 손자인 김유생의 장인 송원영 전 의원.
김복현은 해공(海公) 신익희(건국훈장 대한민국장)와 사돈지간이다. 그의 아들 김재호(1914~1976, 건국훈장 애국장)가 신익희의 딸 신정완(건국훈장 애국장)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재호의 아들 김유생은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서 1942년 태어났는데, 중경의 옛지명 유주의 유자를 써서 유생이라 이름을 지어다 한다. 김복현의 손자인 김유주의 장인이 5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송원영이다.

김복현의 아들 김재호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전주신흥중학에 재학중 적극 참여했다. 이후 1933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김원봉의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입대하여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의 대원으로 활동하다가 김 구(金九)의 소명으로 중경(重慶) 임시정부 선전부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43년 4월에는 해방동맹 소속으로 임시정부의 내무부 사회과장에 임명되었으며, 1944년 5월에 총무과장(總務科長)에 전출되어 계속 임시정부 운영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김복현의 며느리인 신정완은 1919년 3·1독립운동 후 부친인 해공 신익희를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했다. 1937년에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임시정부에 의하여 산동성(山東城) 제2전구 사령부에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지하공작 첩보활동을 했다. 1943년에 남편 김재호와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피선되어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신익희는 1919년 김시학(金時學)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 등을 협의한 후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조동호(趙東祜)·신규식(申圭植)·선우 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서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월 11일에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議員)으로 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官制),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선거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유생의 장인인 송원영은 평안도 출신으로서 언론인이자 정치인(5선 국회의원)으로서 대학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언론인으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명망을 얻었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에서 장면 국무총리의 공보비서관을 역임했다. 이후 신민당 소속으로 서울 동대문구에서 5선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김복현 선생의 가맥은 국내외에서 을미의병과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의정원, 의열단 투쟁, 민주화운동 등 불의에 당당히 맞서 싸운 의로운 사람들이다. 3·1운동 100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90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기억하고 그분들의 헌신적 희생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김재기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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