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특별기획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1부-광주 3·1운동 재조명
(1)동경 2·8선언과 광주 유학생들
(2)남궁혁·김함라 부부, 김마리아 자매
(3)김복현(김철)가맥의 독립운동
(4)10대 여학생 강화선과 윤혈녀
(5) 일곡마을 광산이씨 3부자
(6)광주 고려인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까닭?
(7)3·1운동 참가자 서훈과 예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을미의병부터 임시정부까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주도…의열단도 참여
김복현 일제 재판정서 독립의지 항변 이후 ‘철’ 이름 사용
부친 김창곤·큰 형 김석현은 유생·향리 규합 의병활동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김철(왼쪽 두번째)이 아들 김재호(맨 왼쪽)와 며느리 신정완, 손자 김유생과 함께 찍은 사진. /김재호의 동생 김달호씨 제공
광주3·1운동 참가 동지들의 서명포(1960년 4·19 기념식에서 작성한 것으로 김철선생은 ‘如流歲月四十一年 民族歷史進展’, 한길상 선생은 ‘南北統一’)./김재기 교수 제공
대전 현충원 김복현의 묘비.
3·1운동 주역 김복현과 서정희 경성 고등법원 재판 자료./김재기 교수 제공

1919년 3월 10일부터 시작된 광주 3·1운동으로 구속돼 재판받은 사람은 103명이다. 이들은 4건으로 나뉘어 재판을 받았는데 ‘김복현(김철) 외 21인’, ‘박애순 외 76인’, ‘황상호 외 2인’, 그리고 광주보통학교 학생 ‘최영섭’ 1인의 재판이 그것이다.

광주지방법원의 형량은 김복현(김철·징역3년), 김강(징역3년), 최병준(징역3년), 최한영(징역3년), 한길상(징역3년), 김종삼(징역3년), 김범수(징역3년), 박일구(징역3년), 최정두(징역3년), 김태열(징역3년), 서정희(징역2년), 송흥진(징역2년), 박경주(징역3년), 김기형(징역2년), 손인식(징역1년6월), 강석봉(징역1년 6월) 등이다. 이 중 16인은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했다. 대구복심법원은 박경주에게 2년, 김기형에게 1년 6개월, 강석봉에게 1년을 선고해각각 6개월씩 감형됐다. 나머지는 광주지방법원의 형량이 그대로 유지됐다.

그런데 일제 측 초장임오랑(草場林五郞) 검사가 유독 김복현(징역3년)과 서정희(징역2년)만 서울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재판결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지만 김복현(당시 30세)과 서정희(43세)만 항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두 사람이 김복현의 가족사와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서울 출신인 서정희(당시 직명 主事)의 경우 1907년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모살하려다 붙잡혀 5년 유배형을 받은바 있었던 것과, 3월 10일 광주만세운동에 일반 시민을 동원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서울출신이 서정희가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배를 전라도로 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정희는 김복현 보다 1년의 형량이 낮은 2년형이었다.

광주 3·10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체포된 김복현(1890-1969)의 부친 김창곤(1842-1896)과 장형(長兄) 김석현(1865-1896)은 을미의병활동으로 이틀 사이로 순절한 분들이다. 김창곤과 아들 김석현은 단발령에 항의해1896년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을 규합, 동헌을 습격해 참서관 안종수와 순검 2명을 처단하였다는 죄로 붙잡혀 처형당했다.

3.1운동의 주역으로 3년 징역형

이러한 부친과 큰형의 의기(義氣)는 1919년 3월 광주만세운동에서 목숨을 건 김복현의 주도적 역할을 통해서 나타났다. 김복현외 21명은 광주만세운동으로 경찰서로 끌려가 수개월에 걸친 취조와 모진 고문 끝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서슬 퍼런 법정에서 당당히 소신을 밝힌 이가 있었다.

“국헌을 교란시킨 죄는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관대히 다스리겠다.”

재판관의 말이 끝나자 김복현은 목을 곧게 세우고 힘주어 말했다.

“이번 운동의 책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른 학생들은 그냥 내 보내라. 그리고 내 이름은 김철(金鐵, 김복현의 다른 이름)이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볼 테면 해봐라!”

살벌한 긴장감으로 조용하기만 했던 법정에 쩌렁쩌렁한 김철의 말이 울려 퍼졌다. 그는 이때부터 김철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쇠 철(鐵) 자를 쓰다가 나중에 밝을 철(哲)로 바꾸었다.

1919년 9월 15일 김복현에 대한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복현. 30세. 본적- 나주 나주면 금정.

김복현은 그해 1919년 3월 초순경 경성부 봉래정 신행여관에서 머물고 있던 중에 경성부에서의 조선독립에 관한 시위운동의 실황을 목격하고, - 중략- 위 각 문서를 지니고 같은 달 6일 광주로 와서 김강에게 그 사정을 알리고 그날 밤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의 남궁혁의 집에서 김강 최병준 송홍진 최정두 한길상 김태열 강석봉 손인식 김용규 등과 회합하여 김복현은 위 각 문서를 일동에게 보이고 또한 경성에서 일어난 위의 시위운동의 상황을 말하고, 위의 각 문서를 인쇄하여 이를 널리 일반에게 반포하여 시위운동을 할 것을 제의하고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등에게 각 문서를 인쇄할 것을 교사(敎唆)하였다. 이에 일동은 찬동하였다.

- 중략 - 같은 달 8일부터 그 다음날 9일까지 동면(同面) 향사리 최한영의 집에서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최정두 소유의 등사판과 숭일학교 소유의 등사판을 각 사용하여 위의 선언서 경고문 독립가 합계 수천 통을 인쇄하였다. 송홍진 손인식은 인쇄할 때 숭일학교 소유의 등사판을 꺼내어 이를 제공하고 강석봉은 등사용지 1만매를 사서 제공하여 인쇄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어서 같은 달 10일을 기하여 광주읍내에서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 중 략 - 김복현 김강 서정희 송홍진 최한영 한길상 김종삼은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구 한국기를 흔들거나 혹은 손을 주먹 쥐고 모자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광주시내를 열을 지어 천천히 행진하였다.

- 중략- 각자 위 인쇄물을 광주시내 및 그 부근의 일반 민중에게 반포함으로써 공공의 치안을 방해하였다.

김복현은 재판관에게 광주 만세운동은 전적으로 자기 한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조선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용기 있게 재판장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김복현은 온갖 고문을 받고 차디찬 감옥에서 징역을 산후 출소하여 1920년 7월 29일 오웬 기념각에서 광주 YMCA가 창립되자 초대 총무로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김철은 ‘예비검속자’로 요시찰인물로 분류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았으며 눈곱만큼의 의심 살 일을 해도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져야했다.

1927년 11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창립되자 김복현은 회장이 된 최흥종을 도와 간사로 일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는 수난을 겪었다.

해방 전남건국준비위원회 간사와 부위원장을 맡아 혼란한 해방정국을 수습해 나갔다. 1948년 진보적인 신민당 전남위원장을 맡아 옥고를 겪었고 4·19혁명 후에는 강석봉, 국기열 등과 함께 사회 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는 등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고 1969년 6월 21일 별세했다. 이러한 공적이 인정돼여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00 년 전 우리 선조들이 목숨 걸고 독립만세운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지구상의 악한 권력들은 언젠가는 패망하고 만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았고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손예빈 작가·김재기 전남대 교수

 

손예빈은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 광주전남독립운동가들과 일본장교 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쓴 장편소설 <호랑가시나무언덕>으로 나주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재기
 

김재기 교수는 한민족 독립운동과 디아스포라 연구, 광주학생독립운동 연구, 중국의 소수민족 분리독립운동 연구를 오랜기간 해 온 대한민국독립운동과 통일연구 전문가다. 현재 (사)재외한인학회 회장과 통일부 광주통일교육센터 사무처장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참고 문헌
김복현 판결문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나주독립운동사
나주 YMCA 90년사
광주 60년사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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