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5장 변경<299>

“자, 기상하라. 지금 출발이다.”

다음날 일찍 누르하치가 정충신을 깨웠다. 그렇게 술을 마시며 왁자하게 밤을 새우고도 누르하치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맨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막영지를 돌고 있었다.

조반을 마치자 누르하치가 정충신에게 건장한 말을 내어주더니 말에 올라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젊은 그가 따라붙기에 힘에 겨울 정도로 그는 일도 쾌주했다. 누르하치는 4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하루 저녁에 처첩 여덟을 모두 다구리했다니 힘 하나는 절륜한 호걸이었다.

갈대밭이 우거진 강기슭을 지나고 야트막한 야산을 넘자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 나타났다. 평원의 끝자락에 군마생육장 겸 훈련소가 있었다. 종마소(種馬所)에 이르자 금빛 모자를 눌러쓴 젊은 청년이 달려왔다. 모자를 벗는데 앞머리는 칼로 밀었고 꽁지머리를 하고 있어서 흡사 금방 깐 생율 같은 모습이었다.

“인사하거라. 조선국의 군관이다. 조선국 세자의 밀지를 가지고 왔다.”

“환영합니다. 나는 아이신기오로 추앵이요. 한자로는 저영(楮英)이라고 하고요. 아버님의 첫째 아들 올시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똑부러졌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가슴이 벌어진 장골에 미남이었다.

“말들은 잘 건사하고 있느냐?”

“지금 발정기라 암컷들을 종마에게 접붙이고 있습니다.”

“씨앗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말을 얻지.”

“접붙이는 것도 지겨워서 이거...”

추앵이 시쿤둥한 반응을 보였다.

“여기 조선의 정충신 군관이 옥수수와 감자 씨앗을 가져왔다. 품종이 좋으니 들판에 심어서 식량을 많이 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종마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물이라면 금덩어리 아닙니까?”

“금덩어리보다 낫다. 무릇 씨앗은 생명의 근원이요, 우리 부족에게는 일용할 양식이다. 너는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두 부자의 대화가 겉돌고 있었다. 하긴 누르하치는 추앵을 종마소로 쫓어버렸다. 누르하치가 전방에 가있는 사이 치앵이 누르하치 첩의 방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비의 첩이니 그의 어머니 아닌가. 건주여진 하나만도 한반도 이상 땅이 넓고, 근래에는 해서여진까지 합병했으니 한반도 두세 배의 땅을 가졌다. 누르하치는 정실을 전장에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처첩을 전장마다 두고 욕망을 채우는데, 그 사이 아비의 여자를 손댔다는 것이다. 오랑캐들은 성이 문란한 풍습 때문인지 고만고만한 부족간에 처첩을 나누고, 정략 결혼을 하고, 또 죽은 아버지나 삼촌, 형의 처첩을 물려받아 데리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호색한이기 때문에 그런다기보다 처첩을 먹여 살리는 방편과,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수단으로 그러는 것이었다. 패배한 적장이나 족장의 처첩을 전리품으로 챙겨서 부하들에게 나눠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해서 어떤 장수는 처첩이 백오십 명이나 되었다.

군주 내실엔 복진(福晉) 제도를 두어서 처첩을 계급적으로 구분해 신분을 가렸다. 왕족의 정실부인, 즉 적처를 적복진이라 하고, 명문가의 여식을 첩으로 데려오는데 미안해서 예우하는 측면에서 측실, 즉 측복진으로 부르고, 비정상적 처첩을 서복진이라고 부른다. 물론 천첩도 있으나 모두 서로 경쟁을 붙여 신분상승의 기회를 준다. 이러다 보니 정실인 복진도 여러명이 되었고, 측복진은 기십 명이었다. 신분 상승은 대개 요기(妖氣)가 뛰어나고 잠자리가 절륜한 젊은 처첩이 차지하기 마련이었다. 늙고 한물간 적복진, 측복진은 이름만 가졌을 뿐 현역에서 은퇴한 경우가 많았다.

추앵은 어렸을 때부터 전쟁터에서 살았고, 언제나 피바람을 몰아온 용맹한 전사였다. 올해 나이 열일곱인데 몇 달 전 1천의 병사를 이끌고 다른 부족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다. 누르하치는 그에게 홍파도로라는 칭호를 내렸다. 홍파도로는 만주어로 ‘놀라운 용사’라는 뜻이다. 그런 전과 때문인지 안하무인으로 동생들을 두둘겨패고, 챙긴 전리품을 독식하고, 그러면서 아비의 애첩이자 여진 최고의 미녀 동가(당예흔)를 찔벅거렸다는 것이다. 다혈질에 거친 성품인 그가 강압적으로 두 번째 어머니를 연인으로 여기고 밤을 즐겼다?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주마(走馬) 거리로 한나절 쯤 되는 종마소 겸 군마훈련소로 그를 쫓아버린 것이다. 더 까불다가는 이제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장남이고 나발이고 없다. 그런데도 물정 모르고 대드는 꼴 보면 누르하치는 한심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말 이백필 준비해라.”

“네?” 추앵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준비하라면 준비하렸다!”

“지금 어렵습니다.” 추앵이 단박에 거절했다.

“뭐라고?”

“지금 말들이 모두 발정기인데 교접을 붙여야 하고, 상당수의 암말들은 지금 임신중입니다. 내년에는 배의 말이 생산되지요. 그때까지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때 둘째 아들 다이샨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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