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특별기획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1부-광주 3·1운동 재조명
(1)동경 2·8선언과 광주 유학생들
(2)남궁혁·김함라 부부, 김마리아 자매
(3)김복현(김철)가맥의 독립운동
(4)광주 고려인이 3·1만세운동에 참여 이유
(5) 일곡마을 광산이씨 3부자
(6)10대 여학생 강화선과 윤혈녀
(7)3·1운동 참가자 서훈과 예

할아버지·할머니들 ‘독립투쟁정신’ 잊지 않고 전승
일제 강점기 먼 이국땅서 무장항일투쟁 한 독립군 후손들
100년전 연해주와 서북간도서 만세운동·무장투쟁 전개

일제 잔혹한 탄압·중앙亞 강제 이주에도 ‘독립정신’ 간직
매년 8월 15일 ‘해방절’ 행사 개최…광주서 만세운동 재현

2019년 3월 1일 11시 광주 동구 금남로의 5·18민주광장에 광주시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운집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가졌다. 독립유공자 표창, 퍼포먼스, 재현행사, 시민 100인 대합창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였다. 시민 2천여 명이 ‘제2의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 광주일고를 출발해 금남공원까지 독립만세합창과 행진을 재현했다. 그런데 이날 일제 당시의 한복을 입은 고려인들이 대거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2019년 3월 1일 11시 광주 동구 금남로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재현행사에 참가한 광주 고려인들은 태극기와 당시 독립신문 등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광주 고려인들은 일제강점기 러시아와 서북간도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우리 민족의 후손들이다.

◇독립군 후손들 광주에 3천명 거주
고려인들이 광주에 거주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살다가 일자리를 찾아 하남공단과 가까운 월곡동을 중심으로 거주하면서다. 현재 약 3천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 고려인들이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 태극기를 들고 참여한 것이다. 이들은 ‘고려인박물관 건립’ ‘대한독립만세’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행진에 참여했다.

이 행사에 이어 고려인마을 주민들은 이날 오후 1시 광산구 어린인공원에서 마을 주민 4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재현행사를 개최해 한민족의 자랑스런 후예로서 살아가는 당당함을 만민에게 선포했다. 고려인 재현행사에서 ‘삼일절 노래’, ‘고려인 독립군가’ 합창,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삼창 등 등 3·1 독립 만세를 재현하고 시가행진도 진행했다.

광주고려인들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추적해보면 조선시대 말 신산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삶과 망국의 한이 깊이 깔려있다. 1863년 최초로 조선인 13가구가 연해주 지신허에 정착했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병술국치, 1910년 한일합병의 만행을 자행하자 많은 조선인들과 독립지사들은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유인석과 이범윤,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등은 1905년 러일전쟁의 여파로 친조반일적인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해 독립운동 지도자가 됐다.

안중근과 같은 피 끊는 젊은이들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세계정세와 동양의 평화, 독립의 방략에 대해 심문했다. 마침내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를 처단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이를 계기로 1910년 6월 연해주에서는 유인석과 이상설이 주도해 13도의군을 창설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은 본격화됐다. 이 해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성명회를 결성했다. 또한 독립을 위해 당파성을 극복하고 1911년 12월 권업회를 결성했다. 1914년에는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3군구(노령, 북간도, 서간도)를 거느린 군사조직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이상설을 정통령 겸 군무로 추대했다.

연해주항일무장투쟁 한창걸(1892-1938,건국훈장 애족장) 부대./김재기 교수 제공

◇100년전 연해주에서 만세운동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짜르정부는 같은 연합국인 일본을 의식,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면서 많은 제약이 따랐다.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도 해산시켰다. 몇 년에 걸친 독립운동의 정체시기에 고국에서 들려온 3·1독립만세운동은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한인들과 독립투사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이에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상해, 구주와 미주 등에서는 동조 독립만세운동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1919년 2월 25일 연해주에서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설립되었는데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소왕령)에서 의장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선언서를 각국 영사관에 보냈다. 미국과 프랑스 영사는 동의를 표했다. 러시아 국민들도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독립선언서에 “우리들은 그 독립과 자유의 생존상 신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어떠한 다대한 희생을 지불하더라도 이를 사양치 않을 것”이라고 강력한 대일독립투쟁을 천명했다.

또 대한국민의회는 3월 20일 훈춘 독립선언과 시위를 주도하면서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오후 1시 소총을 가진 500명과 기타무기를 소지한 200명 등 총 700명의 한인들이 훈춘 일본영사관에 집결해 일장기를 끌어내렸다. 이러한 독립만세 시위는 쌍성, 소성, 팔식포, 추풍, 다전, 영안평 등 하바로프스크, 이르크추크 등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모든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1920년 3월 1일에는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을 비롯한 연해주의 한인거주지에서는 3·1독립만세운동 1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히 열리기도 했다.

 

1920년 연해주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 행진 모습./전남대 김재기 교수 제공
1920년 연해주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 행진 모습./전남대 김재기 교수 제공

원래 대한국민의회가 중심이 된 연해주지역과 서북간도 독립운동세력은 3단계 독립운동계획을 수립했다. 1단계는 독립선언·시위운동, 2단계는 1만 명의 무장세력이 국내에 진입하는 무력시위운동, 3단계는 무력시위운동과 동시에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간섭케하고 파견대표가 독립진정서를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상정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을 전쟁지역으로 만들어 전쟁을 수행하는 교전단체 대한국민의회를 강화의 교섭단체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 자체가 연합국의 잔치이자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회의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의 독립문제가 상정이 되지 못하자 평화적 독립노선이나 외교노선은 급격히 쇠퇴했다. 그리하여 무장독립투쟁이 연해주, 서북간도,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 이 지역의 무장독립군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연해주 한인들의 3·1독립만세운동과 무장투쟁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 1920년 1월 백위파의 콜차크 정권이 무너지자 연합국들은 철수하였으나 일본군은 철수를 지연시키면서 1920년 3월 독립군과 러시아혁명군의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이 참패한 니항전투를 구실로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의 기념식이 끝난 4월 4일 부터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한인들을 습격하고 한인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이때 잔악한 일본군은 최재형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사살했으며 한민학교 등 주요한 한인들의 시설물들을 전소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스탈린은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광주 광산구 월곡동 어린이공원에서 열린 고려인들의 3·1운동 기념행사.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기념비./김재기 교수 제공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의 비극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던 한인들은 우슈토베의 황량한 언덕에서 긴 겨울을 이겨내고 이른 봄 들판을 맨손으로 일구어 볍씨를 뿌리고 수확을 했다. 그리고 점차 그곳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고려인으로 불리게 된 그들은 자신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된 원인이 망국이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망국의 한을 온 몸으로 체험한 것도 모자라 남의 땅에 버려지기까지 한 고려인들이 어떻게 조상들의 항일독립운동과 3·1독립만세운동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무장항일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의 후손들이 아닌가?

이에 고려인들은 그곳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도 조상들의 과거 가슴 아픈 독립투쟁의 역사를 잊지 않고 매년 8월 15일 ‘해방절’ 행사를 성대히 치르고 있다. 광주에 정착한 고려인들 역시 20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재현행사에 동참해 100년 전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 가슴에 사무쳤던 망국의 고통과 독립운동정신을 망각하지 않고 오늘도 면면히 전승하고 있다. 현재 연해주 고려인들 역시 매년 3월 1일 신한촌 기념비에 참배를 한다.

2018년 12월 16일에는 (사)한국보훈학회와 (사)재외한인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국제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다.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세미나를 마치고 블라디보스톡의 개척리, 이동휘 구거지, 신한촌과 1999년 8월 15일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건립한 신한촌기념탑에 들렸다. 그리고 이상설의 유해가 뿌려진 솔빈강과 그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기념비를 찾아 참배했다. 우수리스크로 이동해 최재형 선생의 생가, 고려인 문화센터, 안중근의사 기념비 등도 참배했다. 모든 곳이 독립열사들의 애환이 서린 곳들이라 여행을 다니는 동안 매우 숙연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박주성 정치학 박사·글로벌평화연구소 소장

*박주성 박사는 쿠르드분리독립운동으로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전남대에서 강의중이다. 글로벌평화연구소장과 통일부 광주통일교육센터 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제분쟁과 평화문제, 남북통일문제에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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