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원 서정희도 미서훈…6·25때 납북
을사오적 처단 계획 탄로 진도서 5년간 유배
광주 만세운동 주도적 참여…만주서 독립운동

서정희의 형무소 수형 카드(김재기 교수 제공)
서정희의 형무소 수형 카드(김재기 교수 제공)
서정희 제헌의원

광주3·1운동을 주도했던 일곡마을의 이주상이 52세의 최고령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 고령은 최기순(50세)과 서정희(43세) 이다. 최기순은 재판에서 무죄방면됐다. 그는 황해도 황주에서 의병에 참여하여 전라도로 유배형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정희는 1886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고종 때 사람이다. 서정희는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이 탄로나 전라도 진도로 5년 유배형을 받아 전라도로 왔던 것이 광주3·1운동과 인연이 되었다. 서정희는 1906년 1월 나철 등과 대한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계획했다. 1907년 2월 군부대신 권중현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군에 5년간 유배되는 형을 선고받았다가 풀려났다.

1913년 사립 광주법학강습소를 창립하여 법학 교수를 지냈고, 1915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만주에 갔다가 1918년 귀국했다. 1919년 광주 3·1 운동에 주도자로 참여했다가 2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광주 소작인연합회 집행위원장, 경성 조선노농총동맹 총무부 집행위원장, 조선교육협회 평의원, 신간회 조직부장 등을 지냈다. 1925년 1차 조선공산당사건 관련으로 피검돼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 집행위원장,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지도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본부 중앙상무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포천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6.25 전쟁 때 납북됐다. 서정희의 아들 서범석도 양정학교 재학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해방이후 6선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광주 3·1운동 참여자중 국회의원을 역임한 분은 정광호(애국장), 김철주(애족장), 서정희(미서훈) 3분이다. 정광호와 서정희는 6·25 때 남궁혁과 함께 납북된 분들이다. 서정희와 남궁혁은 미서훈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일제 항거하여 고통을 받았고 해방이후에는 분단체제의 희생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예우는 친일청산과 함께 새로운 100년의 대한민국의 과제이다. /김재기(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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