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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특별기획>호남독립운동 선구자 ‘김철’

기사승인 2019.04.10  19: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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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독립운동 선구자 ‘김철’
김구와 함께 이봉창·윤봉길 의거 주도
논밭 정리해 독립자금 마련 상해 건너가

전남 함평군 임시정부청사 역사관내 김철 사당과 영정.

호남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김철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에서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 1녀중 3남으로 출생했다. 1908년 8월 20일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 장덕수, 김철, 조동호, 선우혁, 한진교 등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창당했다. 이때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함께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하여 자신의 전답을 정리,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하여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했다. 같은해 2월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언약받고 3·1만세운동 거사를 계획하고 상해로 건너갔다.

1919년 여운형, 김철, 김규식 등이 협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대한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손병희와 군자금모집 및 국제정세에 대해 협의했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하여 제1회 임시 의정원회의에서 전라도의원에 선임되었다. 1919년 8월 자금조달과 통신연락 및 독립운동가 양성을 담당하는 교통부의 차장직을 맡았다.

1920년 11월에 그는 상해에서 김구, 손정도, 김순애등과 같이 의용단을 발기,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의용단을 결성하면서는 그는 ▲포고문 살포와 선전으로 국민에게 적개심을 격발케 한다. ▲정부를 도와 재정업무를 지원한다. ▲국민에게 개병,개납주의를 주지 시키며 총독부에 소속된 관리를 퇴진시킨다. ▲적의 관청에 납세를 거절한다. ▲일본의 화폐사용을 억제한다. ▲임정의 공보와 기관지를 전달케 한다는 포고문도 발표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동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중국 홍구공원에서의 백천대장 등 일본인 폭살 양대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했다. 1934년 국무회의 비서장에 뽑혔으며, 임시정부의 이동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며 분골쇄신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많은 격무에 시달린 결과 1934년 6월 29일 중국 저장 항저우소재 광자병원에서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당시 나이 48세였다. 이시영, 조완구, 송병조, 양기탁 등 임정요인들의 애도속에 악비묘(岳飛墓) 뒷산에 안장됐다./박찬용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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