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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특별기획-백범 김구와 전라도

기사승인 2019.05.15  20: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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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2부-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전라도인 디아스포라
(1) 임시정부의 전라도사람들
(2)임시정부 의정원의 전라도 사람들
(3)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독립군들
(4)백범 김구와 전라도
(5)임시정부의 ‘비밀금고’ 전라도

도망자 시절 전남서 은거…지역민들 ‘겨레의 큰 스승’ 뒷받침
함평 이진사가·보성 쇠실마을 등 곳곳에 흔적
해방 후 본인·아들 직접 찾아와 고마움 표시
광주 전재민 위해 후원금 쾌척 백화마을 탄생
시·도민, 은거비·기념관 등 세워 정신 계승

-남북 동포에게 보내는 글-
위도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올해 4월 1일 광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 .

대한조국의 완전한 통일과 자주 독립을 외치던 백범 김구(1876.8.29~1949.6.26). 구한말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놈을 맨주먹으로 때려 뉘였고, 모인 사람들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해 해주 텃골 김창수라고 쓴 후 안악 군수에게 보고하라 이르고 그곳을 유유히 떠났다(치하포 사건). 그의 애국심으로 그의 인생은 소용돌이치고 우리의 조국은 겨레의 큰 스승을 얻었다.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인 그는 광주·전남 곳곳에 큰 인연을 남겼고, 그 인연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896년 5월 치하포 사건으로 김구는 인천 감옥으로 잡혀가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은 뒤 결국 1897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담담히 사형을 기다리는 김구에게 고종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사형이 중지됐다. 이듬해 김구는감옥 속에서 몇몇 죄수들과 탈옥을 모의, 옥담을 넘던 죄수들이 들키는 바람에 옥담을 넘던 죄수들 쪽으로 간수들이 쏠리던 차를 이용해 정문으로 빠져 나왔다.

감옥에서 나온 김구는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피신처로 전남 함평의 이동범 진사가, 보성 득량면 쇠실마을 김광언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해방 후 1946년 광주 동구 학동을 방문해 기부금으로 100여 가구의 장착촌인 백화마을을 조성했다.

백범 김구가 도망자 시절 은거한 함평 이동범 진사가의 현재 모습.
함평 이진사 가옥 안내문.

■ 전남 함평읍 남일길 이진사가

치하포 사건으로 도망자 신분이던 김구는 함평 이진사댁에서 1898년 보름 동안 머물렀다. 낮에는 육모정 밑 토굴에서, 밤에는 안채 다락방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함평 이씨 이동범(1869~1940)은 20세기 초 가옥을 건립했으나 이후 안채 7칸 겹집과 정자 육모정은 없어졌다. 다행히 ㄱ자형 사랑채와 문간채는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원래의 육모정은 도로에 편입되어 팔아 버리고 사랑채 옆에 연못을 만들어 육모정 돌을 옮겨 새로이 정자를 짓고 ‘연정’이라 했다. 이진사가는 함평읍내 상가에서 조금 떨어져 인적이 매우 드물고, 기산산성의 고지대로 조망이 용이, 은닉에 적절한 장소였다.

이진사는 일제 강점기에 직접 독립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독립군을 음으로 양으로 도우며 독립자금을 기부하는 등 우국지사였다. 김구가 함평을 떠날 당시 상당한 노잣돈을 마련해 주었고 해방 후 김구의 아들 김 신 장군이 이진사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신 장군이 이진사가로 올 때 경찰서를 거쳐서 관내의 모든 경찰이 동원되어 집에 보초를 서는 등 삼엄한 경계를 폈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신 장군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이진사가를 방문했다. 비행기로 저공하며 김신 장군이 잘 머물고 갔다는 감사의 편지를 떨어뜨렸고 그 편지를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김구 선생님의 후손과 이진사의 후손들이 상호간의 왕래가 이어지고 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에 세워진 백범 김구 은거비.

離別難離別難
(이별이 어려워라 이별이 어려워)

離別難處花樹開
(이별이 힘든 곳에도 꽃나무 꽃 피우네)

花樹一枝分折半
(꽃나무 한 가지 반으로 나누어)

半留宗家半行帶
(반은 종가에 두고 반은 가지고 간다)

生我天地逢何時
(나를 낳은 천지 언제 다시 만날까)

捨此江山去亦難
(이 강산 버려두고 가는 것도 어렵네)

네四員同遊至月餘
(네 사람이 함께 놀며 지낸지 한달여)

齟齬惜別而去也
(서먹하게 석별하며 떠나간다)

日後見此或可思
(훗날 이를 보면 혹 생각날까)

餘否耶遺此表情
(남을지 아닐지 몰라도 이 정표 남기네) -김구 작 ‘이별난’-

■ 전남 보성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김구1898년 도망자 시절 전남 보성군 득량면의 쇠실마을 김광언의 집에서도 40여일을 은신했다. 쇠실마을은 안동김씨의 집성촌이다. 김구는 김광언의 집에 머무르며 뒷산 바위에 올라가 운동도 하고 바위 밑으로 흐르는 물에 멱을 감으며 지냈다고 한다. 특히 지역민에게 당시의 시대상과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가 떠난 후 쇠실마을에는 문풍(文風)이 일어나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김구는 이곳을 떠나며 선씨 부인으로부터 필낭을 선물 받고 답례로 자신이 보던 책 ‘동국사기’를 남겼다. 이 책에는 당시 가명인 김두호의 서명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남긴 위의 글 ‘이별난’ 한시가 적혀있다. 김구는 광복 후 1946년 9월 22일 자신을 숨겨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이때 쇠실마을의 가가호호에 대형 존영과 휘호 등을 하사해 후손들이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입구에 솔문을 세우고 길을 닦으며 환영했고,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했다.

“보성군 삼정리 쇠실마을은 48년 전 망명할 때 수 삼개월이나 머물렀던 곳이다…내가 48년 전 유숙하여 글을 보던 고 김광언 씨의 가옥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환영하니, 불귀의 객이 된 김광언 씨에 대한 감화를 금할 수 없었다.” -백범일지 중에서-

현재 쇠실마을에는 김광언의 집이 남아있다. 후손들은 ‘동국사기’를 보존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1990년에 보성군의 도움으로 ‘백범김구은거 기념관’을 건립해 김구와 보성 쇠실마을의 소중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광주 백범기념관.
광주 학동 역사공원과 백범기념관 외벽.

■광주 동구 백화마을

김구가 해방 후 1946년 광주를 방문을때 광주 대성초등학교에서 ‘김구선생 환영 기념강연회’가 열렸다. 이 때 제1대 서민호 광주부윤(시장)이 환영인사를 하면서 천변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던 전재민들의 딱한 사정을 말하자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받은 후원금과 물품을 모아 전재민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기증했다. 전재민은 해방 전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우리 국민을 말한다.

서민호 부윤은 백범 김구에게 받은 후원금에 지역 유지들의 현금을 보태 옛 학3동 8거리 주변에 정착촌을 조성했다. 100여 가구가 입주한 이 정착촌은 ‘가난하지만 100여 가구가 평화롭게 살라’는 뜻을 담아 ‘백화마을’로 불렸다.

학동8거리는 원래 1920~30년 무렵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곳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은 다시 8갈래의 방사선 골목길로 되어 있고 그 길로 다시 가다보면 같은 8갈래의 방사선 모양의 또 다른 광장이 나오는 형태이다.

그런데 8거리는 일장기의 빨간 태양으로부터 뻗어나간 모양을 그린 욱일기의 형상을 재현해 만든 거리로 알려져 있다. 동그란 공동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8거리는 일본 제국주의 힘을 상징하는 표상이었으며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 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를 이유로 학동 재개발 과정에서 보존보다는 철거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2011년 주거환경개선 사업으로 백화마을의 옛 모습이 사라지고 김구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 2015년 광주백범기념관이 건립됐다. 기념관은 2층 전시관 안내를 포함해서 총 12개의 전시로 나눠서 김구가 걸어온 길을 자세히 관람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입구에는 김구가 원하는 국가에 대한 포부, 가족관계도, 일대기, 어머니에 대한 내용, 백범일지, 김구 선생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상, 광주전남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김구 선생과 전라도 관계, 백화마을 이야기가 서술돼 있다.

광주백범기념관은 우리의 기억은 한계가 있어 겨레의 큰 스승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의미, 광주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억하자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의 후손들에게 대한독립의 과정과 우리의 발자취를 비롯해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날 수 있는 의미를 간직한 곳이다.

이처럼 김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그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걸어오던 중 광주·전남에서의 인연을 잊지 않고 해방 후 꼭 다시 찾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의 사람냄새가 참으로 고맙고 자랑스럽다. 더욱이 함평, 보성, 광주 등등 전라도 땅에 당신의 역사적 발자취를 남겨 님과의 인연이 우리를 진정한 우리로 만들었다. 오는 6월 29일이면 백범이 서거한 지 70년을 맞는다. 진정한 의미의 민족해방과 통일조국을 이루고자 앞장선 백범 김구의 발자취가 새삼 떠올려지는 2019년이다./글·사진=임미숙
 

임미숙 박사

■임미숙은
-교육학박사
-통일부소속 통일강사
-(사)청소년문화육성스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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