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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39주년 시민들이 전하는 참상-④약사 노영옥씨

기사승인 2019.05.15  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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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시민들 계엄군에 개처럼 끌려갔다”

5·18 39주년 시민들이 전하는 참상-④약사 노영옥씨
“광주 시민들 계엄군에 개처럼 끌려갔다”
노영옥 약사, 계엄군에 쫓긴 시민군 100여명 창고로 대피
시민들 무자비한 폭행 뒤 군 트럭에 실려가는 모습 목격

1980년 5월 광주 상공을 배회하고 있는 헬기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이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큰 일이 발생했는데 지휘자가 없는것은 또 다른 이가 주도한 것 아니냐란 것이다. 북한군의 개입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 시민들은 말한다.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이들이 곧 현장 지휘자고 시민군인데 누구의 지시를 받겠냐고 말이다.당시 처참했던 5·18의 참상을 목격했던 한 시민의 목소리를 통해 이를 알아본다 . <편집자주>

“계엄군에 쫓긴 시민군 100여명을 우리 약국 창고에 숨겨주었지. 하지만 이미 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쓰러져 갔어”

70세가 훌쩍 넘은 한 고령의 약사 노영옥씨가 39년전 기억을 되돌려 나온 5·18에 대한 기억의 한줄기였다.


사실상 5·18최초의 집단발포 비극(광주역 부근에서 최초 집단 발포가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있었음. 5명 사망·11명 부상)이 있었던 1980년 5월 20일은 날씨부터 좋지 못했다. 잔뜩 흐리고 오전엔 비까지 내렸다. 서늘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 노씨의 약국은 시민군들의 중간 작전지 역할을 하던 광주공원 인근에 자리해 있었다.

17일부터 이날까지 사흘간의 시민 항쟁 여파속에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자행되면서 광주 도심은 사실상 마비상태 였다. 노씨는 이날 헬기(전교사가 500MD헬기 3대 계엄사령부에 요청)가 날아다니는 것을(월산동에서 도청 방향)처음 목격했다. 광주천을 사이에 두고 7공수여단 등 계엄군들은 이 헬기가 날아다니는 방향에 맞춰 금남로와 광주공원, 월산파출소, 충장로 광주 우체국 일대, 한일은행, 현대극장 주변을 순회하며 진압작전에 나섰다고도 했다. 시민들은 ‘계엄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계엄군에 맞서고 있었다. 이날은 외곽지역인 학동, 방림동, 산수동 등에서도 시민 수천명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택시기사들은 무등경기장에서부터 전남도청 부근까지 차량 시위에 나선 날이었다. 이전 시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시민들 손엔 돌멩이와 각목 등이 들려 있었을 뿐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할 만한 무기는 없었다는 것이 노씨 주장이다.

노씨는 지인 2명과 약국에서 이날 사태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이날 오후 1~2시(추정 시간). 갑자기 100여명의 시민들이 약국으로 밀려 들어왔다. “계엄군에 쫓기고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한 시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씨는 순간 ‘이들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품을 저장하는 넓은 창고에 시민들을 밀어넣고 문 앞에 약품 상자를 쌓아 올렸다. 치밀한 위장을 위해 자전거는 물론 티비 등도 쌓아 아예 창고 문을 가렸다. 동시에 지인에 부탁, 약국 셔터문도 내리도록 했다.

이 모든 작업이 끝난 뒤 불과 10~20초 후 군홧발 소리와 함께 “이 새끼들이 여기로 들어간 거 맞어”하는 계엄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은 이미 닫혀진 약국 셔터문을 강제로 열기 위해 물푸레나무로 만든 진압봉으로 셔터문을 들어 올렸다. 노씨는 지인들과 함께 발로 셔터문을 있는 힘껏 밟았다. 5분가량 셔터문을 열려던 계엄군들은 포기하고 돌아갔다.

노씨는 ‘왜 이들이 갑자기 돌아갔나’ 궁금해 셔터문 중간 뚫린 작은 구멍 사이로 밖을 내다 보고 깜짝 놀랐다. 약국 바로 앞에서 수십명의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붙잡혀 트럭에 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엄군은 의식이 있는 시민들은 팬티만 남긴 채 무자비하게 폭행을 했고, 의식이 없는 이는 팔,다리를 잡고 동물을 던지듯 트럭에 옮겼다. 노씨는 전날인 19일 광주공원 인근에서 계엄군에 의해 시민 한명(김안부씨 추정)이 사망했단 소식도 접한 터여서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노씨는 숨겨 준 이들 중에 다친이들에겐 약까지 쥐어주며 집으로 돌려 보냈다. 하지만 이날 느낀 두려움과 솟구치는 분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노씨를 포함해 당시 지역 약사들은 5·18당시 다친 시민들에게 공짜로 약을 나눠 줬다. 또 다른 방식의 저항이었다.

노씨는 말한다. 5·18은 누구의 지시나 지휘로 발생한 것이 아닌 시민 스스로 나온 저항운동이었다고 말이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할 수 없는 이유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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