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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정 동화작가의 남도일보 월요아침-5월, 부끄러운 고백

기사승인 2019.05.19  20: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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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부끄러운 고백
최유정(동화작가)

 

1980년,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화정여자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오후 수업에 교과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으셨다. 대신 담임 선생님이 들어 와 다들 집에 가라고 했다. 친구 집에 가거나 다른 곳에 들려서는 절대 안 된다고 재차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무척 긴장하고 계셨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몇 마디 해 주신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흥분 때문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집에 간다는 설렘 때문에 선생님 말씀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 모두 조금씩 흥분해 있었다. 숙제도 내주지 않고 내일은 지각하면 안 된다는 잔소리도 없이 집에 보내 주는 날, 이렇게 운수 좋은 날이 14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다들 조금씩 들떠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흡사 소풍날 같았다. 오도 가도 못하는 성에 갇혀 있다 탈출한 기분이었다. 다들 노닥거리기에 바빴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섰다. 정류장도 아닌데 느닷없이 누가 버스를 멈춰 세운 것이었다. 버스 안이 일시에 고요해졌다. 무슨 일이지? 14살, 검은 책가방을 손에 든 우리들은 오리새끼들처럼 목을 기다랗게 빼고 버스 출입문을 바라봤다.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버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상했다. 영화 속 장면에 서있는 것 같았다.

두 명의 군인 중 한 명은 버스 통로를 지키고 다른 한 명은 버스 안을 쓱쓱 지나가며 사람들을 살펴봤다. 총을 든 군인이 그 중 젊은 몇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군인들은 손가락질 당한 젊은이들을 앞세우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꽁무니에 흙 먼지를 매단 버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군인들과 그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바라봤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들려 줄 이야기 꺼리가 생겨서 나는, 신이 났다. 나의 5·18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겁에 질린 표정과 갑자기 멈춰 선 버스, 군인들에 끌려 내려간 젊은 청년들! 시작이 이렇게 선명한데도 기실 나의 5·18은 진짜가 아니고 거짓이었다. 고백하건데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저 선배가 가르쳐 준 것만큼, 책에 쓰여 있는 것만큼만 80년 5월을 받아들였다. 80년 5월은 내게 추상화와도 같았는데 구체적이지 않고 몽당 꺼려 한꺼번에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굴곡 많은 대한민국 역사 속에 묻힌, 묻혀 가고 있는 또 하나의 사건, 교과서 한 구석에 배치되어 있는 낱낱의 사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80년 5월만이 아니었다. 80년 5월 이후에도 이 땅은 숱한 죽음을 요구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었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절박하게 분노하지 않았다. 아니 분노하지 못 했다. 거리에 나가 주먹을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면서도 나는 내가 외치는 구호에 나의 진심, 진정이 들어가 있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파도에 밀려가듯 이끄는 데로 이끌려 다녔고 바람에 휩쓸리듯 그저 휩쓸려 다녔던 것이다. 이제야 고백하는 것이 못내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나는 그저 나였다. 나는 “우리” 에 진실 되게 한 번도 동참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2012년 ‘새벽 기관차 박관현’ 과 2015년 ‘나는 아직도 아픕니다’ 라는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다. 80년 5월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도 울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울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울었다. 나를 바꾼 계기가 또 있다. 2014년 ‘세월호!’ 나는 세월호라는 글자만 봐도 눈물이 나왔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고등학생만 봐도 눈물이 나왔고 학교에 강연을 가면 눈물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누구든 죽을 수 있구나, 죽임을 당할 수 있구나. 누가 죽든 슬픔의 무게는 결코 다르지 않구나. 깨달음은 통렬했고 몹시 아팠다. 세상이 이끄는 대로, 부모가 이끄는 대로, 밀어내는 대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죽을 수 있는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고 내 자식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가야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아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수백, 수천 명의 죽음을 딛고 선 깨달음이었다.

“지난 39년 동안 제 마음에는 아주 무거운 십자가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이 광주의 진상을 밝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만의 십자가를 이 자리에서 내려놓으려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제 아내에게 조차도 39년 동안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사항들입니다.” 1980년 5·18 당시 미 육군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 군사정보관을 지냈던 김용장씨의 2019년 5월 18일 증언 중 첫 대목이다.

이 증언을 듣자마자 나는 39년 전, 군인들에 의해 끌려갔던 21번 버스에서의 그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김용장씨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통합병원에서 시신들을 소각, 바다에 내다버렸다는데 혹여 그 속에 그 젊은이들이 파묻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들이 살아있기를, 그들에게 부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절실하게 빌었다. 나는 무작정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부질없는 기도 중에 눈물이 쏟아졌다. 누가 이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했나, 누가 이들을 죽게 만들었는가, 분노가 일었다. 분노에 치가 떨리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나는 이제야 진정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5월!

39년이 흘렀건만 5·18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저편에서 이편으로, 세상이 노리개마냥 나를 여전히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만 잘 못 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 5월에 대한 망언이 여전히 굴러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80년 5월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 질 때까지 첫 분노의 순결함을 간직하며 살 것이다. 진실을 밝히지 않으려 사력을 다해 버티는 세력이 사라질 때까지 부끄러운 고백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부디 나와 많은 사람들의 부끄러운 고백이 부끄럽지 않을 그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길 바란다.

5·18 40주년이 되는 내년이 오기 전, 5월에 대한 모든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길 바란다. 그래서 더는 분노의 싹을 키울 필요가 없는 날, 분노에 몸을 떨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날이 되길 바란다. 개인의 소박한 소망이자 광주의 소망이고 대한민국이 소망! 이 소망을 하루라도 빨리 이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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