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87.머슴(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머슴 의병장, 기습·유격전으로 일제 간담을 서늘케 하다

담살이 안규홍 농민·군인 모아 의병투쟁
보성·순천 등 전남 동부에서 유격전 펼쳐

파청대첩 등 18개월 동안 26차례 전투
일본군 공세에 몸 피하던 중 체포돼 처형

후손들 <담산실기>에 선생의 뜻 기려
안규홍 보살피던 박제현은 고문당해 불구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퇴위했다. 곧이어 조선군대가 해산됐다. 이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됐다. 전라도에서는 기삼연과 고광순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결성됐다. 그렇지만 기삼연은 순창에서 체포돼 광주천변에서 총살을 당했다. 담양 출신인 고광순 역시 지리산 일대에서 남원·장수 일대 의병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의병활동을 하다 순절했다.

그렇지만 이후 전라도에서는 수많은 의병들이 각지에서 결성됐다. 1908년 이후 전라도는 의병의 중심 지역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의병장은 김준·김율형제, 안규홍, 김동신, 김영엽, 박도경, 심남일, 양윤숙. 양진여·양상기 부자,이기손, 이석용, 임창모, 전해산, 조경환, 황준성 등이었다.

이들 의병장을 출신으로 구분해 보면 김준·김율·심남일·이석용·전해산은 유생, 김동신·박도경·임창모는 중인, 안규홍은 빈농출신이었다. 활동지역으로 구분하면 김준·김율 형제와 양진여·양상기 부자는 광주·나주, 김동신은 지리산, 심남일은 강진·장흥, 안규홍은 순천·보성, 이석용은 임실·진안, 전해산은 고창·영광, 황준성은 해남·완도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광주대 한규무 교수는 구한말 전라도의병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4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일제와 싸운 의병 상당수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싸운 의병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1908년~1909년 사이의 의병투쟁은 일제의 조선식민지 화 정책추진에 상당한 차질을 주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의병지도부가 양반·유생 층에서 점차 농촌 지식인이나 중인·빈농으로 전환 특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넷째는 전라도의병 출신 인사들은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 및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보성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안규홍(安圭洪)은 머슴 출신이었다. 한교수가 지적한 구한말 전라의병의 특징 중 세 번째에 해당된다. 안규홍은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머슴살이를 했다. 전남 지방의 방언은 ‘머슴’을 ‘담살이’라 부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규홍을 ‘담살이 의병장’이라 하고, 안규홍 의병부대를 ‘담살이 의병부대’라 불렀다. 담산(澹山)이라는 호는 여기에서 유래됐다. 머슴 출신인 안규홍이 어떻게 유생을 비롯 농민·포수·군인들이 망라된 의병들의 대장이 됐을까?

■의병장 안규홍

안규홍 의병장이 담살이한 박제현의 가옥(안채). 이 집은 등록문화재 제699호로 지정됐다.

안규홍(安圭洪, 1879.4.10~1911.5.5)은 1879년 4월 10일 전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아버지 달환(達煥)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이고 호는 담산(澹山)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계홍(桂洪) 등이 있다. 안규홍의 집안은 몰락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날 때는 살림살이가 매우 궁핍했다. 게다가 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 안규홍의 어머니는 먼 친척뻘 되는 박제현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살았다. 자연스레 안규홍은 박제현 집안의 일을 하며 컸다. 안규홍은 10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20여 년 동안 담살이(머슴)로 살았다. 안규홍의 성장과정이나 의병투신 과정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안규홍 의병장에 대한 기술은 후손들이 남긴 <담산실기>(澹山實記)를 참조해 적은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담산실기>에 따르면 안규홍은 청년 시절 가혹하게 세금을 걷어가는 군졸들에게 매우 강하게 맞선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안규홍은 온갖 명분을 붙여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의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했을 것이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군졸들과 거친 몸싸움을 벌였을 가능성도 높다. 체구가 작지만 언변이 당당하고 용력 또한 남다른 것을 본 마을주민들은 안규홍이 비록 머슴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게 됐을 것이다.

또한 안규홍에 대한 소문은 이웃 마을로 퍼져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가 의병을 모으자 그의 용감한 행동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었다. 1907년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의병을 빙자해 마을사람들을 위협해 쌀과 재물을 털어가곤 했다. 그래서 마을 단위별로 도둑을 막는(防盜)조직을 만들어 ‘가짜 의병’들의 횡포에 대비했다.

박제현가옥(사랑채). 안규홍은 20여 년간 박제현(1871∼1909, 1990 건국훈장 애족장)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다.

안규홍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도 이런 ‘방도(防盜)조직’이 있었다. 선생은 이 조직을 모체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안규홍은 마을의 양반과 유생들에게 거병(擧兵)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안규홍과 함께 싸우겠다고 나선 이들은 그와 같은 신분인 머슴이나 가난한 농민들뿐이었다. 비록 나라를 구하는 일이었지만 양반과 유생들은 머슴과 함께 일을 도모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안규홍을 따르는 의병들이 모아졌지만 사용할만한 무기는 형편이 없었다. 죽창이나 곡괭이, 낫, 몽둥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안규홍은 동료의병들을 이끌고 순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용언(姜龍彦)의병장을 찾아갔다. 강용언은 강원도에서 활동하다 1907년 말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순천으로 옮겨온 의병이었다. 강용언은 산세와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 용맹한 안규홍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의병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강용언 의병부대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강용언의 행패가 심했다. 1908년 4월 강용언이 주민들의 재물을 빼앗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안규홍은 자신을 따르는 의병들을 규합해 강용언을 제거했다. 그리고 자신이 규합한 의병과 강용언 의병부대원들을 모두 지휘하는 의병장이 됐다. ‘담살이 의병장’ 부대가 생겨난 것이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성격

안규홍 의병장이 사용했던 나침판.(독립기념관 제공)

그렇지만 불타는 의지만으로 전투력이 막강한 일본군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무기가 부족했다. 또 전투에 능하고 일본군의 전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책략가도 필요했다. 그래서 안규홍은 장터를 돌아다니며 은밀하게 의병부대에 투신할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금을 대줄 것으로 호소했다. 이런 적극적인 노력에 따라 안규홍 부대에는 능력 있는 인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구한말 조선군대의 군인이었던 오주일이다. <담산실기>에는 ‘병법에 밝은 서울의 오주일이란 자가 소년 수십 명을 데리고 보성에 왔다가 안규홍 선생을 만나 의병부대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주일은 “일을 하자면 반드시 맹주(盟主)가 있어야 한다”며 안규홍을 의병장으로 섬기기로 했다. 안규홍 의병장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참모를 얻은 것이다. 안규홍 의병부대에 군대조직이 도입되고 엄격한 군율이 적용된 것은 오주일의 영향이 크다.

안규홍 의병장은 의병부대에 군대편제를 도입했다. 부장·참모장·서기·군수장 등의 편제를 갖췄다. 염재보를 부장, 이관회를 선봉장, 임병국·손덕호·정기찬·장재모·송경회를 좌우익장, 안택환·소휘천을 한후장, 오주일·나창운을 참모장, 임정현을 서기, 그리고 박제현을 운량관(군수장)으로 삼아 조직을 정비했다.

안규홍 의병장이 사용했던 유건.

안규홍 의병부대는 두 가지 큰 특징을 갖고 있다. 당시에는 하층민이랄 수 있는 머슴출신 의병장이 지휘하는 부대라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다. 두 번째 특징은 다양한 성분의 의병들이 모인 의병부대라는 것이다. 안규홍 의병부대에는 머슴과 소작농을 근간으로 하는 토착 농민, 장터를 돌며 모집한 농어민, 그리고 강원도지역 의병과 해산 군인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는 안규홍 의병부대의 전투력이 매우 높아지는 요인이 됐다. 우선 고된 노동에 단련돼 있는 하층민들이 대부분이라 의병부대원들의 체력이 강했다. 그리고 다양한 지리와 산세를 잘 알고 있는 토착의병들이 많아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힌 뒤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유격전을 치르기가 수월했다. 인근 농어촌 출신 의병들은 이동 시 식량을 얻고, 일본군 상황을 탐지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강원도 출신 의병들은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이 많았다. 여기다 전술이론과 전투병력 운용에 능한 전직 조선 군인까지 있었으니 안규홍 의병부대는 조직과 무기·전술을 제대로 갖춘 정규군 수준의 의병부대였다. 1908년 4월 보성군 동소산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 안규홍 의병부대는 곧 ‘매섭고 용맹한 의병부대’가 돼 곳곳에서 크나큰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일본 통감부가 ‘안규홍은 심남일과 더불어 가장 용맹하고 출몰이 기민한 거괴(巨魁)’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목표와 활동상황

<담산실기>에는 안규홍이 의병을 거병한 목적과 활동 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 <담산실기>에는 “이들은 본래 농민들로서 비록 상하의 지시나 도움을 받은 바 없지만 원수를 갚고 애국 구민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거병하였다.”고 적혀 있다. 즉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활동 목표와 방향이 제시돼 있음을 알 수 있다.

1. 의병으로서 민간을 침폭하는 것을 금한다.

2. 민간인이 밖으로 곡식을 파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3. 여러 명목으로 파견된 관원이 민간에 해를 끼치면 모두 잡아들인다.

4. 마을에서 공공연히 주구(誅求)를 행하는 자를 금지시킨다.

5. 일본 세력을 끌어들이는 자부터 먼저 죽여 우익(羽翼)을 없앤다.

6. 왜구를 죽여 그 새떼 같은 무리를 제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근본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의 명맥을 길이 보존한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활동방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탐욕스러운 관리들을 없애는 것이고, 둘째는 친일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일본군과 헌병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학한 관리에 대한 징치와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친일파를 응징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안규홍 의병부대에 당시 주민들은 전폭적인 신뢰와 성원을 보냈다. 민폐를 금지하는 엄격한 군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경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둬 백성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부대 운영경비 충당을 위해 횡포한 지주의 소작료나 재산의 일부를 징발하여 사용했다. 또 활동 지역 내 각 면장들에게 일정액을 할당해 징수하기도 했다. 농민들이나 후원자들로부터 은밀한 후원을 받기도 했다. 세금탈취, 군자금 징수, 자발적인 후원 등이 주요 군자금 재원이었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보성·순천을 중심으로 한 전남 중동부 지역에서 모두 26회의 전투를 치렀다. 안규홍 의병부대가 올린 3대 대첩으로는 파청(巴靑)대첩과 진산(眞山)대첩(1908년 8월), 원봉(圓峰)대첩(1909년 3월) 등이 꼽힌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일본 순사와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사살했다. 광양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일본 어민들과 측량대를 습격하기도 했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예당1리에 있는 파청승첩비. 1947년 보성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광복회 광주전남지부 제공)

안규홍 의병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해 첫 승리를 거둔 곳은 파청(巴靑)이다. 파청은 보성군 득량면 예당1리에 있는 고개다. 버들고개라고 불린다. 1908년 3월 순천 낙안에서 파견된 일본군 나가토(米戶)와 히라이(平井) 부대가 이곳을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병을 주변 고개에 매복한 뒤 기습 공격해 일본군 2개 부대를 모두 전멸시켰다. 그리고 다량의 무기와 서류들을 탈취했다.

또 진산(문덕면 귀산리 진산마을)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이후 원봉(복내면 복내리 원봉마을)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기마 주둔소를 기습해 적 50여 명을 사살했다. 이들 전투가 파청대첩과 함께 보성 의진의 3대 대첩이라 일컬어지는 진산대첩, 원봉대첩이다. 파청·진산·원봉전투를 전후로 해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들이 있었다.

대원사(문덕면 죽산리)일대 천봉산에서도 접근해오는 일본군 헌병대를 매복 작전으로 공격해 8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또 안규홍 의병부대는 화순 동복에 주둔하는 일본군 수비부대를 화순군 운월치(화순군 동복면)로 유인해 매복 작전으로 무찔렀다. 일본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와 서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렇지만 안규홍 의병부대는 1908년 5월 서봉산(보성군 복내면 진봉리)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일본군은 많은 병력을 동원, 서봉산에 은거해 있는 안규홍 의병부대를 포위해 왔다. 일본군은 기관단총과 자동소총 등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안규홍부대 의병 25명이 전사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안규홍 의병장은 2개월 정도 남해의 섬에서 은거했다.

그러다가 1908년 8월 토착민들을 모아 보성군 미력면 석호산에 다시 의진(義陣)을 마련한 뒤 의병활동을 재개했다. 이때 의병장 심남일과 안재찬 등이 큰 도움을 주었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심남일·전해산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전개해 나주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일본군 헌병 7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안규홍 의병은 1909년 4월까지 보성·장흥·강진·화순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일진회 등 친일파를 처단했다.

안규홍 의병장은 전남 동부와 중부지역에서 활약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보성은 그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만큼 안규홍 의병부대의 중심활동지였다. 안규홍 의병장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동소산,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했던 서봉산, 그리고 재기했던 석호산이 모두 보성에 위치해 있다.

■일제의 안규홍부대 토벌작전

남한대토벌작전 때 체포된 안규홍 의병장(뒷줄 우측에서 다섯 번째). 1910년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하기 전 촬영된 의병장들의 모습이다.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전남지역 의병부대를 섬멸하는데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헌병들은 1908년 10월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를 편성했다. 영산포헌병분대의 후원을 받는 정찰대는 밀정들을 동원해 의병부대 은거지 및 가족들에 정찰과 염탐을 실시했다. 12월 15일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아래 8개 부대가, 광주수비대에서는 3개 부대가 안규홍과 심남일, 전해산 의병부대 등을 진압하기 위해 동시에 출동했다.

그리고 1909년 6월 초부터 3개의 변장정찰대가 안규홍과 심남일·전해산 의병부대의 주둔지를 찾기 위해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들 의병부대의 위치와 병력을 파악한 다음 광주와 남원의 병력을 차출해 9월 1일부터 조선의병토벌작전을 개시했다.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다. 일제는 10월 말까지 보병 2개 연대, 공병 1개 소대를 비롯한 군함 수 척, 해군 11정대 등을 동원해 의병타격에 나섰다.

안규홍 의병부대 섬멸에 나선 일본군 지휘관은 일 보병 제20연대 토미이시(富石) 대좌였다. 토미이시 대좌는 안규홍 의병부대를 압박해 들어가는 한편 의병 가족들에게 귀순을 종용하는 선무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안규홍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8월 말 의병부대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은신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담산실기>에는 안규홍의병장이 휘하 의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적혀있다.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천운이 일정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으니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또한 이치로서도 그러하다.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후원도 없고, 안으로는 범이 잡아먹으려는 위급한 지경에 있다. 게다가 선량한 백성에게 해독이 미치고 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여러분들은 각자 잘 계획하여 다시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라’

안규홍 의병장은 염재보, 정기찬 등과 함께 은밀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안규홍의병장은 9월 25일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에서 일제에 체포됐다. 안규홍 의병장은 광주감옥에 갇혀 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감됐다. 1910년 6월 22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안규홍 의병장은 결혼을 했으나 자손이 없었다. 그래서 큰 조카가 안의병장의 양자로 들어가 제사를 모시고 있다.

안의병장의 증손인 안병진씨에 따르면 안의병장 후손들은 고인이 순국한지 23년 만에 사형을 당한 대구에서 유해를 모셔왔다고 한다. 1910년 안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가족들은 의병대장들의 교수형을 집행한 사람을 수소문 끝에 만나 안의병장이 묻힌 장소를 확인해 돌로 표시해두고 왔다고 한다. 일제치하인 탓에 탈골이장을 할 때 쉬쉬했지만 지역사람들이 부조금을 모아줘 큰 도움이 됐다고 전해진다.

안규홍 의병장 순국 후 2개월만인 1910년 8월 22일, 조선은 일본에 강제로 병탄되고 말았다. 그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안규홍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의병 박봉석·손덕오·정기찬·염재보 등도 같은 해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안규홍과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있으면서 보살펴준 박제현은 안규홍의 먼 친척이었다. 후에 안규홍 의병부대에서 군수장(軍需將)으로 활동했다. 박제현은 1909년 문덕면 병치에서 붙잡혀 일본 헌병에게 고문을 당해 불구가 돼 버렸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16년 열린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부산 공연모습.(보성군 제공)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전남 보성군은 지역역사문화자원 선양사업 일환으로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을 널리 알리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71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울과 부산, 보성 등지에서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창작 공연을 열기도 했다. 서울공연은 강남구민회관에서, 부산공연은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공연장에서, 보성 공연은 채동선음악당에서 각각 무료로 실시됐다.

■담산실기(澹山實記)

<담산실기>. 안규홍 의병장과 부장들의 의병 활동이 기록돼 있다.

<담산실기>는 1954년 안규홍 의병장의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안의병장과 그의 부장·참모 등의 이야기를 한문으로 기록한 책이다. 1923년 대구에서 안규홍의 유해를 이장해 올 때 쓰여진 전기와 광복 이후 집필된 순의(殉義)사실, 묘표, 승첩비 내용, 참모들의 행적, 안규홍 장군 후손이 쓴 편지 등이 2권에 걸쳐 실려 있다. 김은수 광주대 명예교수와 안동교 조선대 한국고전번역센터 책임연구원(조선대 연구교수)이 공동번역했다.

<담산실기>는 2권 1책으로 구성돼 있다. 권1에는 안규용(安圭容)이 기술한 ‘순의사실’(殉義事實)‘과 대구에서 반장(返葬)할 때 향유(鄕儒)가 지은 제문 및 90여명이 지은 만시가 실려 있다. 이어 가장(家狀)이 실려 있고, 임석모(任奭模)의 ‘사행략’(事行略)’, 안규용의 묘표, 유영근(柳泳謹)의 묘지명이 올려 있다.

<담산실기> 목판.

권2에는 보성군 파청(巴靑)마을의 대첩을 기린 글들이 실려 있다. 김영한(金寧漢)이 쓴 ‘파청승첩비’(巴靑勝捷碑), 안종남(安鍾南)의 ‘파청입비시설위고유문’(巴靑立碑時設位告由文), 김영보와 선승호 등이 지은 ‘파청입비시다사고문’(巴靑立碑時多士告文), 안종남의 ‘입묘갈시고유문’(立墓碣時告由文)’ 등이 있다. 이어서 안종남이 지은 ‘전(傳)’과 안종남, 김문옥이 지은 ‘서전후(書傳後)’가 실려 있다.

손제영, 임정모, 김영환, 선충호, 박태균 등이 각자 쓴 ‘서후’(書後)가 있다. 뒤에는 ‘경제담산의적후’(敬題澹山義蹟後)’란 제목의 시가 3수, 염재야록(念齋野錄)에서 뽑은 ‘청사명록’(靑史名錄)이 수록돼 있다. 부록으로 염재보, 송기휴, 안택환, 소휘천, 임정현, 임민호, 김도규 등 몇 사람의 행록(行錄)이 붙어 있다. 서문은 성기운(成璣運), 최병심(崔秉心), 양회갑(梁會甲) 등이 썼다. 발문을 쓴 이들은 안종남, 최상률(崔相律), 유영근, 최동현, 신길휴, 안성환 등이다.

<담산실기>중 안규홍 의병장 자료.

도움말/홍영기, 한규무, 박도, 김은수, 안동교

사진제공/정동수, 서광춘, 김갑제, 보성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