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3장 북청 유배<363>
“고산의 애첩이라고?”
백사가 물었다. 고산은 나이로는 그의 막내아들 뻘이었으나 시문(詩文)이 경지에 올라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뛰어난 문장과 명석한 두뇌가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 안타까웠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운명이 기구하다고 백사는 속으로 연민을 가졌다.
“애첩이 아니옵니다. 문장이 출중해서 따랐사옵고, 처지가 애달파서 보필했나이다.”
조생이 부정했다. 고산 윤선도는 그때 성균관 유생이었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지만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고 수호하는 상징 기관이었다. 유생의 자격도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자들 중 성적 우수자에게만 입학이 허용될만큼 권위가 있었다. 문묘의 수호자인 유생들은 국가의 안위나 유교의 수호에 관한 사안에 관해서 유소(儒疏)라는 상소문으로 유림사회의 현실인식을 알렸다. 유생의 공론은 조정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라고 해도 처벌되거나 무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유생들은 권당(일종의 파업)으로 맞섰다. 문묘 수호라는 고유한 기능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고산은 강직한 성품 그대로 시비를 가림에 있어 타협이 없었다. 이이첨 대북 세력이 득세해 조정을 분탕질하자 그는 이이첨을 비난하는 유소를 올렸다. 당장 노여움이 떨어졌는데, 광해보다 실권자인 이이첨이 들고 일어났다.
“저런 개새끼, 죽여버려야 한다. 유소고 유서고 저런 반항분자는 더이상 필요없다.”
방방 뜨는 것을 광해가 말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를 떠나왔고, 조생이라는 기생을 만났다. 그 역시 백사와 다를 것없는 처지였으나 이태 전 이곳을 떠나 남쪽으로 이거했다.
“나는 살만큼 살았고, 글 쓸 기력도 없다. 지필묵이 많이 들어왔으니 고산에게 보내주어라. 문사는 글을 써야 하느니...”
백사는 조생에게 전달해달라고 지필묵을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다시 찬바람을 쐬니 고뿔에 걸렸다. 그러나 바로 눈 앞에 험준한 함관령(咸關嶺:함경도 함주군 덕산면과 홍원군 운학면 사이의 고개)이 가로막고 있었다. 계곡이 깊고 경사가 급하여 굴곡이 심하나 관북 중부 해안지방의 중요한 종단 교통로라서 반드시 넘어야 할 재였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준령을 타고 달려오는 살점을 떼어내는 듯한 북풍이 눈보라를 끝없이 날리고 있었다. 눈이 키 만큼이나 쌓여서 낭떠러지와 평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말이 넘어져 수레가 뒹굴고 사람들이 굴러 자빠졌다. 백사는 꽁꽁 언 몸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눈썹이 얼어붙어서 앞을 보지 못하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하얗게 매달렸다. 정충신이 달려가 번갈아 손을 모아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어서 백사의 수염을 녹였다.
이웃 고을에 주둔한 조 첨사가 달려와 “나는 직접 책임은 없지만 어찌해서 대감과 같은 중신에게 이런 극심한 고통을 준단 말인가!”하고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다. 금부도사가 눈을 부라리며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도 상황을 아는지라 더 이상 단속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유배단은 고개를 넘고, 뒤이어 쌍령을 넘으니 고개 아래 숲속에서 무인 이희룡 이언린이 불쑥 나타났다. 행색은 꼭 짐승 무리처럼 여우 늑대 가죽 털옷으로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대감께서 병조판서로 계실 때 저희들은 대감의 은혜를 입어서 변방의 군진(軍陣)에 보직되어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대감의 은덕에 감격하고 있는데 어찌 이런 행차를 하시는가요.”
이들 역시 사정을 알고 혀를 차며 발막까지 행차를 인도했다. 수레가 덜렁거리고 바퀴가 부숴졌다. 군졸들이 나와 새롭게 수레를 만들고 말도 교체해주었다. 군관인 신계의 안내를 받아 떠나니 북청 병사(兵使) 현즙이 우후(虞候)와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회천 변에 군막을 치고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사대감, 저는 대감의 명으로 북청 병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멀리도 오셨습니다. 대감이 죄인의 몸인지라 관아로 모실 수가 없어서 여기에 군막을 친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곳으로부터 북청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백사는 착잡한 심정이면서도 안도의 빛을 띠고, 정충신을 불러 지필묵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가 시 한 수를 지었다.
흙더미에 꽂힌 송패에는 북청이라 기록되었고
나무다리 서쪽 편에는 맞이하는 사람 적더라
첩첩산중은 호걸을 가두었는데
천 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 막혀 갇힌 몸이 되었구나
유배단은 북청읍내 강윤박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현즙 병사는 심부름 하는 사환, 부엌일 하는 여종, 말 먹이는 남종 한 명씩 제공했다.
“규정에 없으나 제 뜻이니 받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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