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3장 북청 유배<364>
강윤박은 건달이었으나 북청에서는 부자였다. 기생 만옥의 기둥서방으로 물장사 따위 사업으로 돈을 모은 사람이었다. 만옥이 원래는 북병사로 온 청강 이제신의 총애를 받은 기생이었다. 서울에서 백사가 오자 이제신을 본 것처럼 그녀는 반가워했다.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제신은 선조 대에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으로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백사는 친구 청강을 모신 연분으로 허물없이 그녀를 대하였다.
만옥의 딸 경선까지 기적(妓籍)에 올라있었다. 누구는 청강의 씨라고 했고, 또 누구는 관찰사의 종자라고 했으나 기적에 오른 이상 누구도 신분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만옥은 서울로 떠난 낭군들을 그리워하며 추억을 먹고 사는 퇴물이었으나 창과 가야금 솜씨만은 농익어서 그 가락으로 연명하였고, 딸년은 한창 물오른 나이라서 잘 팔려나가고 있었다.
정충신은 풍족한 집안 살림에 종들이 마당에 가득하고, 항상 술에 취해있는 강윤박을 보면서 거처지를 옮길 것을 염두에 두었다. 찾아오는 사람들 대하기가 민망하였다. 마침 윤박의 사위인 유생 집 사랑채가 비었다는 것을 소식을 듣고 백사를 향해 말했다.
“거처지를 옮기시지요.”
“나도 그리 생각했다.”
먹는 것, 이부자리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것을 백사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생의 집으로 옮기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북청 유생 전학령 이정수 김몽진이 찾아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아뢰었다.
“몇년 전만 해도 지방 관장(官長)들이 청렴하고 법을 잘 받들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그 시절이 백사 이항백 대감께서 조정에서 정사를 주관하던 때였습니다. 상공(相公:재상의 높임말)께서 정사를 보셨을 때는 관속의 기율이 분명하고,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노래했는데 상공께서 물러나시고 대신들이 바뀌면서 탐관오리들이 늘어나고, 세금을 살인적으로 부과해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있나이다. 저희야 대감께서 이 험한 곳으로 귀양 오셔서 존안을 뵙게 되니 복으로 알지만, 온 나라 백성들은 어찌합니까.”
어느날은 이웃에 사는 심서 형제가 찾아왔다. 이들 형제는 고매한 선비로서 이이첨 세력에게 밀려 갑산으로 귀양온 사람들이었다.
“북청 지방은 보시다시피 매우 춥고 백성들의 사는 형편이 어렵습니다. 산비탈에 손바닥만한 땅을 붙여 사는 사람들이고, 사냥이나 산약초를 캐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북관의 지방 관속들이 탐욕하고, 관기가 문란하여 혼탁합니다. 관속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착취해서 견디기 어렵다 합니다. 청렴하고 애민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는 지방 관장을 말한다면, 전 병사 유승서와 갑산부사 구인후 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지난날 백사 공이 천거한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이 백사 공을 우러르는 것은 그냥 하는 일이 아니옵니다. 앞으로도 그런 인물을 뽑아서 파견해야 할 것이옵니다.”
유승서는 백사의 비장을 지낸 사람이고, 구인후는 백사가 병조판서 시절 핵심 막료였으며, 후에 포도대장, 어영대장,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반정공신으로서 좌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알겠노라.”
그들을 물리고 난 뒤 백사가 정충신을 불렀다.
“여기 와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것 같으이.”
백사는 판관, 우후, 군수들이 찾아와 술과 고기를 내지만 반갑지 않았다. 정충신은 스승이 추위와 먹는 것에 대한 불편으로 날로 몸을 버거워해서 기분전환 요량으로 호랑이 사냥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날 사냥꾼들이 밤새 눈이 한 자 이상 쌓였는데 호랑이 발자국이 있다고 병사에게 알려왔다. 병사는 보고를 받고 즉시 기마 병졸들을 이끌고 정충신을 찾았다.
“정 공, 호랑이 사냥을 나가겠습니다. 백사 대감께서 기운이 나시고 기분전환도 하시도록 사냥 솜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뢰어 주십시오.”
정충신은 백사의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주기로 마음 먹고 호랑이 사냥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여러 필의 기마병이 병사를 따라 눈보라치는 벌판을 다투어 달리다가 산속으로 들어갔다. 얼마후 표범 한 마리를 몰고 나왔다. 표범은 중송아지보다 컸다. 기마 병졸들이 좌우로 퍼져 말을 달리면서 화살을 날렸다. 여러 대가 빗나갔지만 두세 대가 표범의 몸에 명중했다. 표범이 눈밭에 나뒹굴었다. 표범의 피가 선연하게 눈밭에 번졌다. 병사들이 발악하는 표범에게 달려들어 큰 몸뚱이를 쪄누르고 네 발을 능숙하게 끈으로 묶은 뒤 긴 몽둥이를 밀어넣어 들쳐메더니 백사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멱통에 대나무 빨대를 꽂아 피를 한 사발 받아서 백사에게 내밀었다.
“기운 차리십시오. 유배는 건강입니다.”
백사가 주춤거리자 정충신이 대신 나서서 사발을 받아 피를 마셨다. 따끈한 온기가 느껴지는 표범 피는 비릿했으나 상쾌했다. 반쯤 마시고 백사에게 사발을 내밀었다.
“스승님, 기운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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