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8. 조선과 12척의 배(下)

조선수군이 궤멸된 칠천량 전투의 패인과 교훈
조선수군 칠천량 바다에 수장(水葬)되다

日수군 도망 다니며 조선수군 지치게 한 뒤
1천여 척 왜 전선 새벽에 칠천량 기습공격

당시 원균은 곤장 맞고 홧술에 취해 인사불성
조선수군 경계도 세우지 않아 무방비로 당해

조선수군 죽거나 도주 200여척 불에 타 궤멸
원균·이억기·최호 조선수군 지휘부 모두 전사

선조의 무능과 조정대신의 무지가 부른 禍
남해장악한 일본군 뱃길로 전라도 공격 나서

이순신 죽이려 명량 진격했다가 오히려 참패
지금 역시 ‘12척의 배’ 상황, 단결로 克日해야
 

칠천량 일대 해상지도(네이버지도참조). 일본 수군은 가거도(붉은 원)와 견내량 일대 해협에 전선을 배치시킨 뒤 칠천도(푸른 원)에 정박해 있는 조선수군 전선을 기습공격했다. 퇴로가 막힌 조선수군은 진해만과 고성 춘원포로 쫓기다가 결국 몰살당했다. 한산도 조선수군(연두색 원)이 궤멸된 것이다.

■칠천량 전투가 조선·일본·명에 가져다준 변화

1597년(선조 30년)음력 7월 16일 거제 칠천도 부근에서 조선수군과 일본 수군사이에서 벌어진 칠천량 해전은 조선에게는 악몽을, 일본에게는 대설욕을 안겨준 전투였다. 칠천량 해전은 임진·정유재란 조선 수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본 전투였다. 그러나 그 패배는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칠천량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지휘부가 모두 전사했다.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 등 160여척이 불에 타거나 일본 수군에 빼앗겼다. 조선수군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요행히 목숨을 건진 수졸과 격군(格軍:노젓는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전선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죽음의 바다를 빠져나온 12척이 전부였다. 칠천량 전투의 패배로 조선수군이 장악하던 서남해안은 일본 수군의 독무대가 됐다. 이순신의 수군에 가로막혀 바닷길을 이용해 전라도로 넘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전선을 타고 남해와 하동~광양~구례를 거쳐 전라도로 진격해왔다.

일본화가가 그린 임진왜란 해상전투도.

칠천량 전투는 조선과 일본, 명 3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은 위기 속에 빠져들었다. 의병과 군량미를 조달해 조선을 지탱하고 있었던 전라도가 무너지고 충청도와 경상도 등이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목숨걱정에 빠졌다. 그래서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대신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까지 치솟았다. 거칠 것이 없었다. 칠천량 전투 이후 왜군은 전라·경상·충청도를 휩쓸고 다니며 백성들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아갔다. 수많은 문화재와 수백 명의 장인(匠人)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간계(奸計)를 써서 이순신을 옥에 갇히게 하고 조선수군을 궤멸시켰으니 조선을 송두리째 먹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일본군은 지금까지 바다에서 당한 그 수많은 치욕을 칠천량 전투 단 한 번으로 앙갚음했다. 명도 다급해졌다. 조선수군이 일본 수군을 잘 막아준 덕택에 명 해안에 일본수군이 접근하지 못했으나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명은 수군을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1598년 7월 16일진린 도독 등 명군 5천여 명이 전선 400여척에 나눠 타고 고금도진에 도착했다.

임진정유왜란 당시 조선에서의 전쟁참상을 묘사한 일본 측 그림. 선조로 보이는 인물이 죽어있는 백성들을 보고 황망히 달려가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상황

○조선군 상황

1596년 11월 6일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황신(黃愼)은 일본이 조선을 재침할 것이라 판단했다. 황신의 보고에 따라 조선은 전쟁준비를 했다. 각 지역의 산성을 튼튼하게 고치고 병사와 병기를 확충했다. 그리고 적이 침입해오면 물자를 모두 태우는 ‘청야전술’과 (淸野戰術)과 수군을 이용한 ‘해로차단전술’(海路遮斷戰術) 두 가지를 기본 전술로 채택했다. 황신의 판단대로 1597년 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정벌에 다시 나섰다.

○일본군 상황

1593년부터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쌓은 성에 들어가 주둔했다. 조선백성들을 괴롭혀 식량과 물자만 빼앗아가고 되도록 전투는 피했다. 일본 수군 역시 조선수군이 나타나면 육지로 도망가면서 싸움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선(軍船)을 튼튼하게 만들고 수군 병력을 늘려나갔다. 그리고 조선수군의 전술을 연구해 이에 대응하는 해전전투요령을 개발했다. 또 이순신제거를 위한 음모를 벌여나갔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전함은 세끼부네(關船)위주의 소형군선이었다. 세끼부네는 충격에 약하고 급선회가 힘들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전투소강기간 동안에 일본 수군은 큰 전선인 아다케부네(安宅船)를 많이 건조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전선으로 무장한 것이다.

또 조선 수군에 승리할 수 있는 해상전법개발과 훈련에 주력했다. 야간기습작전능력을 늘리고 조선수군이 즐겨 사용했던 포위협격전술을 도입했다. 조선수군 상황을 탐지할 수 있는 관측병을 늘리고 관련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하는 체제를 갖췄다.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전술을 훤히 꿰뚫는 한편 조선수군 내부 상황과 이동 등을 훤히 알 수 있는 첩보체계를 갖췄다.

○전술과 정보전에 밀린 조선수군, 경계까지 소홀히 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규모와 이동이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대낮에 움직였다. 전술의 기본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원균 함대는 1597년 7월 5일 부산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남해안 일대 섬과 섬의 좁은 수로를 통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섬의 높은 곳에서 바다를 지켜보고 있던 관측병으로부터 보고받은 정보를 취합해 조선 수군의 이동시기와 이동로, 이동방향을 헤아리고 있었다.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전투계획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조선수군은 별다른 전투계획이 없이 무작정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려는 것을 간파했다. 일본 수군은 안골포·웅포·가덕·김해·죽도 지역에 분산된 함선들을 모두 부산으로 집결시켰다. 1천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전함은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에 대기하면서 조선수군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과의 전투를 피하면서 조선수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칠천량 해협에 정박해 있는 조선수군을 야간에 기습 공격해 결국은 조선수군과 전선을 모두 수장시키고야 만다. 이 때 조선수군은 감시병을 세우지도 않았다. 원균은 그날 밤 술에 취해 있었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강항이 쓴 <간양록>과 정희득의 <해상록>에는 포로가 돼 일본 군선을 타고 있으면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몰살당하는 전투장면을 지켜본 포로들의 증언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정유년 7월 15일에 왜장이 날쌘 군졸과 날렵한 배를 타고 조선군사의 동정과 조선병선(兵船)을 정찰했다. 우리 병선의 군사들이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으므로 적도(賊徒:일본수군)가 포(砲) 두 발을 발사했다. 당황한 우리 군사가 닻줄을 끊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자, 적도들이 병선을 끌고 와 한꺼번에 공격 진격하는 바람에 한산도(閑山島)가 마침내 무너졌다.’

■칠천량 해전 참패 원인과 책임질 사람들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칠천량 해전의 참패에 대한 책임은 원균이 뒤집어쓰고 있다. 전통적 국민정서도 ‘친(親) 이순신 반(反) 원균’이다. 이는 원균의 잘못도 크지만 조정대신들이 원균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칠천량 해전 참패로 조선 삼도(전라·충청·경상)가 유린되자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고 조정대신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가려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힌 사람이다. 원균에게 잘못을 물으면 결국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선조는 끝까지 원균을 두둔했다. 다른 조정대신들 역시 이순신을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원균을 수군통제사에 앉힌 원죄(原罪)가 있다.

임란초기 백전백승의 놀라운 전공을 올리면서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해낸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고문한 사람들이 바로 선조와 조정대신들이다. 조정대신들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자 원균의 책략 없음과 통솔력 부족을 집중 비난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무고도 가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또한 원균을 천거한 대신들을 비난하면서 그 난처함을 빠져나갔다.

실은,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한 것은 선조의 무 개념과 머리로만 전쟁을 치르는 조정대신들의 무능, 원균의 전략·지휘능력 부족이 총체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부터 이순신과 조선의병들의 활약을 줄곧 폄훼해 왔다. 실제 선조는 임진란 이후 86명의 환관들을 호성공신(扈聖功臣)명단에 올렸다.

선조피난행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회본태합기에 삽입돼 있는 삽화다.

그러나 전쟁에 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올린 자는 불과 18명이었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운 관군과 의병보다 의주까지 도망가는 길에 자신을 보살펴준 환관들의 공을 더 크게 여긴 것이다. 그러면서 선조는 기회가 날 때마다 명나라 군사들이 조선을 구했다고 말했다. 이순신과 의병장들의 분투는 일부러 폄훼했다.

조정대신들은 문신으로 전투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무맹랑한 전략을 가지고 조선군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도원수(都元帥)권율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권율은 원균을 두 차례나 불러들여 곤장을 때리면서 일본수군 전선이 집합해 있는 부산포를 공격하도록 채근했다. 일본수군의 규모와 능력을 과소평가해 왜군의 소굴로 조선수군을 몰아넣었던 것이다.

역사학자와 군사학자들은 칠천량 해전 참패 원인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전략과 목표설정이 불분명했던 조선수군의 부산포 진격(권율의 육상공격은 없었음)

2. 경계소홀과 전투 주도권 상실(일본수군의 의도대로 끌려갔음)

3. 원균 부임 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병력과 훈련(조정의 지원이나 대책은 없었음)

4. 원균함대의 최악 기동력(격군의 수가 부족하고 장거리 노 젓기에 기진맥진한 상태였음)

5. 부적절했던 육군의 수군작전 지휘권과 수군지휘부의 불화(해전을 모르는 문신들이 수군을 지휘하고 이순신과 원균 부하들 간의 작전협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음)

6. 원균의 부대장악능력 부족과 조선수군 위치노출 및 경계실패(일본수군 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함)

7. 정찰실패(칠천량 정박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해 기습공격을 당함. 또 가덕도에 상륙해 정찰과 경계를 소홀히 한 채 허겁지겁 마실 물을 구하다 기습공격한 일본군에게 조선수군 400명이 도륙을 당함)

최석남은 ‘군사연구 제139집 305’(1922)<정유재란기 칠천량해전의 패인 분석>논문에서 칠천량 참패의 책임자들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선조실록을 편찬한 편찬위원장인 총재관은 처음에는 서인 이항복이었으나 후에는 북인 기자헌이었다. 이항복이나 기자헌은 모두 이순신을 수사로 천거한 남인 유성룡의 반대파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원균에 대해 탐학하기가 유례가 없는 자이며 크게 군심(軍心)을 잃은 자라고 평했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충용하고 재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정한 것은 매우 옳은 정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권자인 선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순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이순신을 깎아내려야만 원균의 대죄를 덮어줄 수 있고, 원균의 대죄를 덮어 주어야만 삼도수군을 전멸시킨 원흉으로서의 자기 죄를 얼버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때 칠천량 해전의 책임은 보는 이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고 책임의 우선순위는 바뀔 수 있으나 전제권자인 선조, 수륙작전을 총지휘했던 도원수 권율, 칠천량 해전을 직접 지휘했던 원균에게 그 책임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강정현은 <임란 시 수군활동과 지휘통제>(해양전략 제96호, 1997, p.74-83)논문에서 칠천량 해전 패배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수군 지휘계통에 대한 문제점과 수군지휘부의 반목(反目)을 해결하지 않아 효율적인 작전수행이 어려웠다는 점을 들고 있다. 선조와 조정은 임란당시 수군지휘관에게 작전권을 부여하지 않고, 육군지휘관의 작전지휘를 받도록 했다.

조선 수군의 작전권이 수군통제사가 아닌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속해 있었다는 것은 해전을 모르는 문신들이 수군을 지휘했음을 의미한다. 조선수군은 전투력이 강해 거제도를 기준으로 한 남해 서쪽바다에서는 절대 우위를 점했으나 일본수군들이 밀집해 있는 진해만이나 부산앞 바다에서는 협공을 받아 패배할 우려가 컸다.

그래서 이순신은 일본수군이 서해로 올라가는 해로를 차단하는 국지적인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이순신이 일본의 간작(間作:간첩)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군대가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바다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면 그의 목을 베고 일본 수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 꼬드겼음에도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덫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해서이다.

그런데 권율은 이런 위험성을 간과했다. 원균 역시 이순신이 출정하지 않아 가토기요사마 군대가 바다를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을 비난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수군통제사로 와보니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다. 그런데 원균은 자신의 과거 판단이 틀렸다고 인정한 뒤 ‘부산포 진격이 위험천만한 작전’임을 알리지 않았다.

미적미적 대다가 권율의 질책을 받고서야 어쩔 수 없이 작전에 나섰다. 떠밀려 나간 전장에 장수가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원균은 과거 이순신의 부하였던 수군장수들을 미워하면서 모욕을 주었다. 배설이 “칠천도는 바다가 얕고 좁아서 배를 움직이기에 좋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진영을 옮겨야 합니다”라고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작전을 논해야할 때 여자를 품고 있었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술에 취해 있어 조선수군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선조와 조정대신, 권율, 원균 등은 잘못된 판단에 사로잡히고 전황에 맞지 않는 전술을 사용해 결과적으로 조선수군이 궤멸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칠천량 해전의 전개상황

○안골포ㆍ가덕도 해전

원균은 출전을 재촉하는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의 성화에 떠밀려 1597년 6월 18일 100여 척의 크고 작은 함선을 이끌고 가덕도 앞바다로 출동했다. 원균은 안골포에서 일본 군선 2척을 빼앗았다. 이때 보성군수 안홍국 등이 전사했다. 원균은 부산포까지 진격하지 않고 중간에 되돌아왔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권율은 원균이 부산포를 공격하지 않고 회군했다는 소식에 원균을 사천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곤장을 쳤다.

○절영도 해전

조선 수군은 7월 4~5일쯤 부산포를 향해 두 번째로 출정한다. 칠천도 외줄포-영등포-옥포를 거쳐 7월 7일 새벽에 말곶으로 향했다. 7일 저녁에 절영도 먼 바다(外洋)에 도착했다. 절영도에는 일본 수군 1천 척이 조선수군과의 전투를 위해 대기 중에 있었다. 조선수군은 일본 수군에 다가가 전투를 시작하려 했으나 일본 수군은 전투를 피하기만 했다.

일본 수군들이 조선수군의 기동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회피전술을 쓴 것이다. 조선수군들은 며칠 동안 쉬지 못하고 노를 저어오느라 몹시 피곤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는 일본수군을 쫓아다니니, 격군들의 체력은 더욱 고갈됐다. 때마침 심한 파도가 몰려왔다. 거센 조류에 휩쓸려 조선수군 20여척의 배가 일본수군 쪽으로 떠밀려갔다. 이 배들은 모두 집중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수군은 칠천량으로 되돌아왔다. 9일 밤 칠천량 외줄포에 도착했다.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던 권율은 조선수군이 전선과 군사만 잃고 후퇴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11일 원균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또 곤장을 쳤다. 매를 맞은 원균은 분했다. 군중에 돌아와 진탕 술을 마셨다.

부하 장수들이 원균을 만나 작전을 논의하려 했으나 술에 취해 드러누워 버린 원균은 일어나지를 않았다. 이에 조선수군은 아무런 작전을 세우지 못했다. 적의 기습에 대비해 수군을 재배치하고 방어계획을 수립해야 하는데도 그러질 못했다. 경계선을 띄워 적의 내습을 미리 탐지해야 하는데도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

도원수 권율이 조선수군의 최고지휘관인 원균을 불러들여 두 차례나 곤장을 친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조치였다. 군령을 어기는 자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처벌하라는 선조의 지시가 있었지만 조선수군 사령관을 매질한 것은 지나쳤다. 아무리 영(令)에 복종하지 않는다 해도 전투를 앞둔 수군최고 책임자를 체벌하는 것은 온당한 처사라 할 수 없다.

○칠천량 해전

칠천량으로 돌아온 원균의 조선수군은 아무런 전투준비를 하지 않은 채 며칠을 지내고 있었다. 원균이 술에 취해 자리에 누워있기에 수군장수들은 이렇다 할 작전회의도 하지 못했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은 조바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이전부터 배설은 칠천도 해협은 얕고 좁아서 전선을 운행하기가 불편하니 다른 곳에 진을 치자고 건의를 해왔다.

그런데 일본 수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은데도 원균은 아무런 방비 없이 자리에 누워만 있으니 속이 타들어 갔다. 배설은 수하의 장수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만약 왜선들이 일제히 공격해와 진영이 무너지게 되면 철수할 장소 등을 미리 정해두었다. 그런 다음 왜선들의 공격에 대비해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경계상태에 들어갔다.

배설의 거듭되는 칠천량 철수 건의를 당시 원균은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부산포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원수 앞에 끌려가 곤장까지 맞고 온 마당에 더 후방으로 수군진을 옮긴다고 하면 혹독한 문책과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원균은 칠천도가 조선수군이 싸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균은 ‘작전상 후퇴’를 할 수 없었다. 원균의 진퇴양난은 결국 조선수군의 몰락을 가져왔다.

일본군은 조선군과 의병, 백성들의 코를 잘라 전리품으로 도요토미에게 보냈다. 본 교토시내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자리한 코무덤(이총공원)

일본수군은 7월 15일 칠천량에서 반나절이 못돼 도달할 수 있는 안골포(지금의 창원 진해구 일대)와 웅포 일대 바다에 1천여 척의 전선을 전진배치 시켰다. 15일 저녁에 일본수군 몇 척이 조선수군 전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 은밀히 다가와 4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조선수군의 경계상태와 전투준비상황을 점검해본 것으로 추정된다.

16일 새벽 일본 수군은 칠천량 일대 바다를 겹겹이 둘러싸고 외줄포에 정박해 있는 조선수군을 일제히 공격해 왔다. 조선수군 통제사는 술에 취해 자고 있었고 장수들은 이렇다 할 작전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군사들은 지쳐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경계도 서지 않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당한 것이다.

기습공격을 당한 조선수군은 칠천량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배설은 일본수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군선을 이끌고 한산도 쪽으로 피했다. 조선수군은 칠천량 남단으로 쫓겨오면서 전투를 벌였으나 이미 전투대형은 흐트러져 버린 상태였다. 정상적인 작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선수군은 두 패로 나뉘어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조선 수군의 주력 선단은 거제도 해안을 끼고 남쪽 견내량(見乃梁)으로 내려갔다. 견내량은 현재의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 아래 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이다. 지금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걸쳐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좁은 해협에는 일본수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앞뒤로 갇혀 거센 공격을 받았다.

2018년 9월 현의송씨와 박주언씨 등 ‘왜덕산 사람들’이 일본 코무덤 평화제에 참여해 조상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가졌다. 왜덕산 사람들은 일본군들의 주검까지 안장시켜준 진도사람들의 평화로운 정신을 기리고자 모인 사람들이다.

조선수군은 견내량을 통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춘원포(고성)쪽 바다로 쫓겨 갔다. 넓은 바다로 가지 못하고 육지로 막혀 있는 바다로 갔으니 도망갈 길이 없었다. 육지에는 일본 육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육지로 도망쳐오는 조선수군을 도륙했다. 춘원포쪽으로 도망간 조선수군은 살 길이 없었다. 원균 역시 춘원포에서 육지로 올라 도망가다가 왜군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

조선수군의 다른 선단은 진해만 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가덕도와 거문도 사이의 바다를 틀어막고 진치고 있던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을 육지 쪽 진해만으로 몰아붙였다. 결국 조선수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200여척의 전선 중에 남은 것은 배설이 이끌고 간 12척뿐이었다. 연전연승하던 조선수군은 이 칠천량 전투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 것이다.

류성용이 남긴 <징비록> 초본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한밤중에 왜군의 배가 진영을 기습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바닷가로 달아나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몸이 살찌고 무거워 소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혹 그가 적에게 죽었다고 하고 또는 그가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바다로 투신해 죽었다. 이에 앞서 배설은 이전부터 이대로는 반드시 질 것이라고 원균에게 간언했다. 이날도 “칠천도는 바다가 얕고 좁아서 배를 움직이기에 좋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진영을 옮겨야 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원균은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배설은 자기가 지휘하는 배 10여척에 가만히 명령하여 엄중히 경계하며 변란에 대비하게 했다.

배설은 적이 아군을 습격하는 것을 보자 항구를 벗어나 먼저 피했기 때문에 그의 수하 전선과 수군만이 온전하게 남았다. 배설은 한산도로 돌아와 막사와 군량미, 병기를 불태우고 섬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옮겨 적의 공격을 피하게 했다. 이순신이 수년간 군영을 운영해 모은 전선과 기계가 남김없이 없어졌다.

(夜半, 倭船來襲之, 軍大潰. 均走至海邊, 棄舟登岸, 欲走而體肥重, 坐松樹下, 左右皆散. 或言爲賊所害, 或言走免, 終不得其實. 李億祺從船上投水死. 先是, 裵楔屢諫均必敗, 是日又言 “漆川島淺窄, 不利行船, 宜移陣他處” 均皆不聽. 楔私約所領船十餘隻, 戒嚴待變. 見賊來犯, 奪港先走, 故其軍獨全. 楔還至閑山島, 縱火焚廬舍·糧穀·軍器, 徙餘民之留在島中者, 使避賊而去. 李舜臣數年經營舟船·器械, 蕩然無遺.)

■이순신, 12척의 배로 조선을 구하다.

명(明)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에 나오는 조선수군의 왜 수군 공격 장면.

지금의 한일경제전쟁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지난해부터 계속돼 왔던 일본 정부관리들의 경제보복 발언과 징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야 정치인들은 정당과 정파로 나눠 매일 싸우면서 국가를 병들게 했다. 냉정하게 해결책을 강구해야할 청와대 참모들은 ‘대법원징용판결을 비난하면 친일’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한국민을 ‘한일경제전투장’으로만 몰아넣으려 했다.

이런 상황인 만큼 ‘제2의 충무공’과 ‘제2의 12척’이 절실히 요구된다. 국민들이 의병이 되고 기업총수들이 의병장이 돼 환란의 대한민국을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적절치 않다. 정치와 경제는 구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2의 충무공’은 우리 국민 모두가 돼야 한다. ‘12척의 배’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일본제품을 사지 않고, 일본 여행을 가지 않은 것은 일본에 한국인들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것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장기적 수출규제는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것처럼 한국경제를 벼랑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지금은 전략적 화해와 전술적 후퇴를 통해 벼랑에서 올라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 일본의 경제적 종속관계를 끊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현실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일본이 때린다며 미국에 말려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은 명에게 살려달라고 사정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패권주의 일본을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과거 일본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역사도 잘 알고 기억해야 한다.

배설을 비겁한 장수라고 비난만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때로는 후퇴할 수도, 무릎을 꿇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힘을 키워야 한다. 치욕을 잊지 않고 복수의 칼날을 갈아야 한다. 그것이 극일의 길이고 종국에는 일본에 승리하는 길이다. 역사를 잘 알아 힘을 키우는 것, 그것이 충무공 이순신이 12척의 전선으로 보여준 ‘사즉생’(死則生)의 정신이라 생각한다.

도움말/정만진, 이민웅, 이원희, 최석남

사진제공/최종만

그래픽/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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