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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최혁 주필의 무등을 바라보며

기사승인 2019.08.13  19: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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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일보 최혁 주필의 무등을 바라보며
‘순간의 선택’이 결정지은 韓日 600년의 우열(優劣)
최혁(남도일보 주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유명한 광고문구가 있었다. 이 카피(copy)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대입시키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가능해진다. ‘순간의 선택이 600년 한일 간의 우열(優劣)을 결정지었다.’ 물론 월등한 쪽은 일본이고 열세인 쪽은 한국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 경제 갈등을 보면 확연해진다. 칼자루를 쥔 쪽은 일본이고, 행여 그 칼에 다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쪽이 한국이다.

어쩌다가 그랬을까? 1천500여 년 전만 해도 한국과 일본은 문화와 기술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반도 사람들은 글자는 물론이고 농사짓는 법, 저수지 쌓는 법까지 당시 문명의 하이테크를 일본에 전수해 주었다. ‘별 볼일 없던’ 일본이 ‘한 가닥 하는 센 나라’로 등장하는 시점이 서기 663년의 백강 전투(白江戰鬪)다. 백강전투는 신라·당의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왜국의 연합군이 맞서 싸운 전투다. 나당연합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국 군사 수는 4만2천 명 정도다. 타고 온 전선이 1천여 척에 달했다. 이 군사력은 지금의 후쿠오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하나의 세력에서 나온 것이다. 백제에 군사를 보낸 사이메이 덴노와 나카노오오에 세력은 당시 왜국의 수십 개 세력 중의 한 개에 불과했다. 일개 지방 세력의 군사력으로서는 대단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해안이 많고 땅이 넓어 수많은 지방 세력들이 발호했다.

백제부흥에 힘을 보탠 원군(援軍)으로서의 왜군은 세월이 지나가면서 성격이 변했다. 백제에서 건너간 왜인들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원수로 여겼다. 그래서 틈만 나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괴롭혔다. 어떤 이들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전통적인 적대감은 이때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후쿠오카를 포함한 큐슈와 야마구치 등 한반도에 가까운 일본(倭)세력들은 고려와 조선을 ‘털어먹으며’ 힘을 키웠다.

우리가 말하는 왜구(倭寇)다. 이들은 도둑이 아니었다. 일본 땅에 기반을 둔 어엿한 지방세력(藩)이었다. 일본의 남북조 전쟁에서 북쪽 세력에 밀린 남쪽 세력들은 부족한 쌀과 물자(전선을 만드는 나무 등), 노동력을 고려 땅에서 구했다. 왜구는 1223년부터 169년 동안 고려를 529회 침입했다. 매년 3번꼴로 쳐들어온 셈이다. 왜구는 고려·조선의 섬과 내륙지역을 ‘수혈지’로 삼았다. 급기야 고려 말에 왜구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해 개경을 공격해오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구의 수장들을 규합해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정유재란이다. 임진·정유재란 기간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부대 외에 도공납치와 문화재탈취 등 특수임무를 띤 6개 부대를 운영했다. 임진왜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조선이 회취법(灰吹法)이라는 은(銀) 제련법을 외면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회취법은 세종때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라는 사내가 개발해낸 획기적인 은 제련법이다.

1526년 일본 이즈모에서는 최대 규모의 은광이 발견됐다. 하지만 일본은 은 제련법이 낙후돼 원하는 만큼의 은을 생산하지 못했다. 일본은 은밀히 이 회취법 기술을 들여갔다. 반면 조선은 이 회취법을 매장시켰다. 회취법으로 은을 많이 생산하면 명에게 바칠 조공량이 늘어날 것을 염려해서다. 일본은 회취법을 이용해 막대한 은을 생산해냈다. 그리고 조총을 사들이고 자체 제작했다. 조선과 일본이 내린 순간의 선택이 ‘한일 간 600년 우열’을 결정짓고 만 것이다.

회취법 도입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 일본이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후손들에게 넘겨주게 된다. 바로 도자기를 굽는 제조기술과 불을 다루는 가마기술이다. 1644년 히가시지마라는 상인이 붉은 염료법 ‘아카에’(赤繪)‘를 배우면서 도자기 제작에 대혁명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 후손들은 백자에 울긋불긋한 문양과 각종 화려한 꽃그림, 풍경들을 집어넣었다. 지역별로 특색있는 도자기가 생겨났다.

심당길은 박평의와 함께 사쓰마 야키(薩摩燒)라는 도자기 유파를 열었다. 조슈번 이작광과 이경은 ‘하기야키’(萩燒)의 원조가 됐다. 나가사키에서는 이우경이 이름난 도자기 ‘하사미야키’(波佐見燒)를 구워냈다. 이 도자기들은 유럽으로 불티나게 팔려갔다. 막대한 자금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메이지정권은 도자기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과 근대 제련술로 군함과 대포를 생산했다. 그리고 조선을 마침내 식민지로 삼았다.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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