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4부 풍운의 길 1장 인조반정<402>

서인들의 반정(反正)은 명나라를 버리고 후금과 등거리 외교를 펴는 광해를 치는 데 좋은 명분이 되었다. 동방예의지국의 근본을 흔드는 폐모살제라는 패륜 행위가 중요한 반정의 이유가 되었지만, 친금배명(親金背明)은 반정의 명분이 쌓이는 어쩌면 더 중요한 가치가 되었던 것이다. 문명국이 어찌 은혜로운 부모국을 부정하고 도둑떼인 오랑캐와 친교를 맺는단 말인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조선 사대부의 자존심을 팍팍 긁는 이런 행위들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광해군이 즉위할 때부터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들은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했다. 북인 이이첨의 권력 독점과 탐악을 보고 칠 명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중 이귀?김류가 선두에 섰다. 함흥판관으로 가있었던 이귀는 북우후(北虞候) 신경진을 끌어들이고,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괄을 불러냈으며, 유생 심기원·김자점과 내통하여 전 부사 김류를 진군대장으로 삼았다. 김류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 장군 휘하에서 막료장으로 종군하다가 탄금대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金汝?)의 아들이었다.

진군대장 김류는 1623년 3월 13일 밤, 미리 밀통을 내려 심기원·최명길·이괄?김자점이 병력 600∼700명을 인솔해 홍제원에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이중 이괄이 데려온 함경도 군사들은 정예부대였다. 능양군 이종(후에 인조)은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에서 황해도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명과 합류해 홍제원에 모여 김류의 부대가 창의문을 치고 창덕궁으로 진군할 때 지원군으로 참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시간에 김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나서지 않으면 역사를 바꾸는 거사가 죽도밥도 안되는 상황이다. 죽도밥도 안되는 정도가 아니라 본인의 목숨은 물론 3대가 수수모가지 잘리듯이 잘려나갈 판이다. 그런데 출격하기로 한 날 진군대장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병사들 모두 안나와도 대장만은 나와야 하는 것이 지휘관의 사명이자 본분이다. 그런데 발발 떨고 숨어버린 것이다.

“이거 낭패로다. 큰 일이로다.”

이귀는 몹시 당황했다. 시간이 지체되면 반정은 도성 방위군에게 들켜 궤멸될 것이다. 왕실을 보위하는 근위병은 최정예부대다. 기마 기동력은 물론 무기류도 반정군에 비하면 월등하다.

“한 식경(食頃: 밥 한끼 먹을 약 30분의 시간)이 지나면 위험하고, 두 식경이 지나면 우리는 패인을 자인하고 전부 자결한다.”

지원군 지휘자 심기원이 비통하게 말했다. 시간은 한 식경을 지나 두 식경이 가고, 이윽고 세 식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패배를 자인하고 목을 내놓을 일만 남았다. 이때 이귀가 단안을 내렸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다. 이괄이 앞으로 나와 진군대장을 맡으라. 진격이다.”

괄괄한 성격의 이괄이 지휘봉을 쥐었다. 다행히도 자신의 병력이 가장 우수했다. 그는 한달음에 군을 재편성해 도성으로 진입했다. 창의문을 지키는 초병들을 간단없이 제압하고, 창덕궁으로 질주했다.

“돌파하라. 반발하는 자는 남녀노유, 신분의 지체를 불문하고 아가리에 창을 박아라!”

용맹스런 함경도 병마절도사 부대가 맨 선두에 서고 계속 치고 나갈 때, 김류가 나타났다.

“지휘권은 나에게 있다. 이괄은 나에게 지휘봉을 넘기라!”

밥상을 다 차려놓자 김류가 숟가락만 얹는 꼴이었다. 이괄이 화를 냈다.

“당신, 무엇이 무서워서 숨었소?”

“뭣이? 상황을 살피고 왔다.”

“개소리 마시오. 그것은 정탐병이 하는 일이오. 나의 부대가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을 향해 진격하면서 승리할 것 같으니까 나타난 것 아니오? 비겁자는 당장 꺼지쇼!”

이때 김류의 나이는 52세였다. 이괄의 아버지 뻘이었다. 그는 반정의 기획자 이귀와도 둘도 없는 막역한 사이였다. 이귀는 김류의 우유부단한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이괄이 김류를 개잡듯이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세상 만물의 이치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고,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이괄 장수, 그게 뭔가. 늦게라도 김류 대장이 왔으니 다행스런 일 아닌가. 대장 자리 물려주고, 병사를 이끌고 창덕궁을 우회해서 공격하라. 한시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이괄은 느닷없는 꾸지람에 화가 치밀었다. 잘못된 것을 준엄히 꾸짖고, 대장으로서 나아가는 자신을 전폭적으로 밀어줄 것으로 알았는데, 잔말 말고 자리를 내놓으라니? 그는 이귀에게도 대들었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장이 잠시 지체되었을 뿐, 금방 돌아왔으니 김류가 진군대장이다. 김류 대장, 어서 지휘하시오.”

“에이, 시팔!”

이괄이 지휘봉을 내던지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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