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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 작가의 광주의 의인들 (6)한말 의병장 기삼연

기사승인 2019.09.19  19: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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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우 작가의 광주의 의인들
(6)한말 의병장 기삼연
을사늑약 체결에 1천 의병 일으켜 일제 항거
발 부상에 은신 중 검거… 서천교 백사장서 처형돼
광주 가가호호 추운 겨울 방에 불도 안때고 ‘애도’

성재 기삼연 선생 묘소. 1907년 호남지역 의병을 규합, ‘호남창의회맹소‘를 설립한 기삼연은 그해 10월 고창 문수산전투, 12월 영광 법성포전투 등을 전개해 큰 전과를 세웠고, 이후 그는 장성, 담양, 나주, 함평, 광주 등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계속하다 1908년 담양 금성에서 일본군에 체포, 서천교 백사장에서 5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황광우 작가
한말 의병장 기삼연의 순국비.
기삼연 순국비 설명문.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싸움 잘한다 김죽봉 ”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군대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나서는 의병의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초야의 선비가 1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1907년 호남창의 회맹소를 포고한 성재 기삼연은 이 불가사의한 일을 이룬 분이었다.

기삼연,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더 이상의 방랑을 마친다.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아들 우생(宇生)을 불러 말했다. “읍내의 집을 정리하고 수연산(隨緣山) 기슭 송계 마을로 이사하자.” 우생의 나이 26세였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수연산 기슭은 대낮에도 산짐승이 나타나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송계 마을로 거처를 옮긴 기삼연은 1896년 백마 타고 300여 의병을 지휘하던 백의장군이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셨다. 상민 출신의 선머슴들과 술을 마시며 놀았다. 큰 뜻을 품던 선비가 저잣거리에서 술이나 마시는 폐인이 되었다. 그렇게 소문이 돌았다. 일본 헌병대는 기삼연에 대해 더 이상 감시하지 않게 되었다.

기형도라는 청년이 있었다. 기형도는 기삼연의 종손이었다. 형도는 사냥을 취미로 삼던 젊은이였다. 그에게는 총이 있었다. 의금부에서 제작한 장총 세 자루와 호신용 권총 두 자루가 있었다. 형도는 아끼는 총기를 할아버지에게 내놓았다. 그는 할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눈치 채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기삼연은 수 십 자루의 총을 모았다. 그런데 화약이 없는 총은 총이 아니다. 화약은 총기 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화약을 만들기 위해 먼저 오줌 찌꺼기를 모아야 한다. 오줌 찌꺼기를 물에 넣고 끓이면 초산이 나온다. 여기에 황을 섞고, 삼의 줄기를 함께 빻으면 화약이 된다. 땀을 비처럼 쏟아야 하는 일이다.

이제 실탄을 만들어야 한다. 실탄을 만들려면 쇠가 필요하다. 삼연의 형 양연(亮衍)은 동생이 품고 있는 뜻을 알고 있었다. 형은 동생에게 무쇠덩어리를 구해 주었다. 이제 대장간을 지을 차례이다. 풀무를 설치하고, 불을 땐다. 벌겋게 달아오른 쇳물을 바가지의 물속에 떨어뜨린다. 쇳물 방울은 찬 물 속에 들어가 쇠구슬이 된다. 하루 종일 10여 명이 작업해서 고작 실탄 서너 말을 제작했다.

이제 군사를 일으키려면 식량과 의복을 구해야 한다. 기삼연은 이용중(李容中) 전 군수를 찾아갔다. 기삼연의 뜻을 알고 있던 군수는 선뜻 900냥을 내놓았다. 큰돈이었다.

이렇게 하여 호남창의 회맹소의 깃발이 펄럭인 것은 1907년 10월 30일로 기록된다. 장성과 영광과 고창 세 곳의 분기점인 수연산의 중턱에서 오색 창연한 깃발들은 가을바람에 펄럭였고, 흰 옷의 제복을 입은 수 백 여명 백의의 전사들은 피를 마시면서 맹세했다. “왜놈들을 때려잡고, 나라를 구하자.”

그 해 1907년 6월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기 위해 특사로 파견되었다. 7월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였고, 8월 군대를 해산하였다. 가만히 앉아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었다.

기삼연은 호남 의병이 일어선 뜻을 전국의 선비들에게 고하였다. 대한매일 신보사 독자들에게 글을 보냈다. “나라가 부숴지고 집이 망하였습니다. 누군들 자나 깨나 원통하고 울부짖으며 저 왜적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삼연은 동지들을 창솔하여 의병을 모아서 본 월 9일, 본 군 수연산 가운데 깃발을 세웠습니다. 승패의 수는 미리 헤아릴 수 없으며, 살고 죽는 의의는 본래 두 가지가 아니므로, 삼가 거사한 전말을 팔도에 고하나이다.”

12월 28일 성재는 발을 다쳐 더 이상 종군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재는 동료들에게 알렸다. “내가 발이 상하여 지척의 행보도 할 수 없다. 상한 발을 끌고 엉금엉금 이십 리를 왔다가는 다시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어 복흥 지방에 이르렀다.” 기삼연은 군사들로 하여금 각자 집에 가서 설을 지내고 정월 보름 뒤에 다시 모이기로 결정했다. 성재는 비밀리 구수촌(九水村)의 집에 머물렀다. 다음은 송사 기우만이 작성한 “호남의사열전”에서 가져온 기록이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음식을 먹으려는데, 적 수 십 명이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기대장(奇大將)을 내놓으라면서 집주인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돌연 성재는 창에서 큰소리를 질렀다. “기 대장은 여기 있다. 주인이 무슨 죄냐?”

광주로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메고 가는 이들도 눈물을 흘리느라 잘 가지 못했다. 성재는 경무서(警務署)에 갇혔다. 의병이 사방에서 몰려온다는 풍설에 적은 놀라 겁을 먹고 장수를 총살했다.

1908년 2월 3일이었다.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들은 광주 부중(府中) 만호(萬戶)에서는 애도를 표시하기 위해 불을 때지 않았고 부녀자들도 설이라 해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거리에 나와 놀지 않았다. /글, 사진=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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