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59)
제4부 풍운의 길 3장 안현전투(459)

어둠 속인지라 정통으로 칼이 내리꽂히지 않은 모양이다. 이괄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칼을 찾았다. 기익헌이 그를 향해 마구잡이로 장검을 휘둘렀다. 선제 공격만이 살 길이다. 마침내 이괄이 쓰러지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시각 이수백은 한명련의 노숙지(露宿地)로 숨어들었다. 그의 뒤에는 죽은 광주목사 임회의 지방 군사 이십 여명이 따랐다. 주군이 이괄에게 잔혹하게 죽자 그들은 이수백의 휘하에 편입되었는데, 경기도 광주의 쌍령 고개와 묵방리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노숙 중이었다. 열댓 명은 곤지암으로 진출하기도 했지만 지휘자가 없으니 갈팔질팡이었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역성 혁명의 도구가 되어선 안된다.”

이수백 일당이 그들의 주군 이괄을 친다는 것을 알자 그들은 단번에 자기 주군 임회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다. 이수백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는 한명련 앞에 이르러 큰소리쳤다. 그의 휘하 군사는 대부분 도망가서 낙담한 나머지 그는 술을 들이켜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감히 묻노라. 상감은 어찌 되었나.”

“상감마마는 공주 행재소에 몽진중이지 않느냐?”

“너희들 상감 말이다.”

그들의 상감은 반 강제로 데려다 앉혔던 흥안군 제다. 옥새도 없이 창덕궁 옥좌에 앉혔는데, 도망칠 때는 그의 존재도 까맣게 잊고 도성을 빠져나와버린 것이 의리상으로나 이치상으로 맞느냐는 질책이다. 이 점 기익헌 이수백도 마찬가지였지만, 명령체계상 이괄과 한명련이 모셔야 했다.

“너나 나나 피장파장 아닌가. 그리고 나는 몽진하도록 알려드렸다.”

“그랬더니?”

“왜 싫다는 사람 잡아다가 왕위에 올려놓고 사세가 급하니 너희들끼리 도망치려 하느냐고 노발대발하셨다. 그러니 방법이 없었다.”

“너희들이 모셔놓고 왕을 옹위하지 못했으니 그 책임을 물어 벨 것이다.”

기익헌의 서있던 군관이 달려들어 대창으로 한명련의 복부를 찔렀다. 그가 피를 쏟고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김선철 역시 임회의 다른 군사들 지원을 받아 이괄의 심복들을 처치했다. 내부 반란은 이렇게 정리돼버린 것이다. 난군의 부장 김선철도 사세를 읽고 칼을 거꾸로 들어버린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명련의 아들 윤과 조카 성백이 도망을 쳤다. 그는 북으로 내달려 압록강을 건너서 후금에 투항했다.

말이 왕이지 격식이라곤 갖추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흥안군 제는 자신이 이괄의 괴뢰(傀儡:꼭두각시)였음을 알고 땅을 치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흥안군은 도리없이 시종을 불러 “동쪽으로 길을 떠나지”고 명했다.

그러나 동쪽의 낙산으로부터 관군이 창의문 쪽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돌아와 인경궁 뒤쪽 곡성(曲城: 성문을 밖으로 둘러서 굽어지게 쌓은 성)으로 올라갔으나 그쪽에서도 관군이 집결해 있었다. 흥안군은 호위병들마저 흩어져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부인이 막았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전하는 죄가 없사옵니다. 이용되었을 뿐이옵니다. 칼을 거두소서.”

따지고 보니 그 스스로 반역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괄에게 얼겁결에 추앙을 받아 왕위에 올랐던 것이니 따지고 보면 그도 억울했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명했다.

“말머리를 돌려 광주 땅으로 가자. 광나루를 건너자.”

흥안군은 전복(戰服)으로 갈아입은 뒤 갈기가 휘날리도록 말을 달렸다. 그러나 광나루에 이르는 살곶이 다리에서 정충신 전부대장의 휘하 안사성과 한휘에게 붙잡혔다. 흥안군을 포박해 정충신에게 끌고 가자 정충신이 명했다.

“장만 도원수에게 압송하라. 명색 왕자인데, 내가 즉결처분할 수 없다.”

안사성과 한교가 흥안군을 도원수부에 바치니 도원수 장만 또한 함부로 할 수 없어서 한남도원수 심기원, 도감대장(都監大將: 수도를 지휘 감독하는 대장. 留都大將 등 비슷한 직책들이 많은데 난리엔 정규직, 임시직을 망라해 벼슬을 남발했다) 신경진 등이 단호히 외쳤다.

“제는 이미 위호(位號:왕위의 벼슬)를 참칭한 대역부도한 죄를 지었으니 필부도 잡아죽일 수 있소이다. 후환을 막기 위해서도 빨리 처치해야 합니다.”

도원수부는 법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흥안군을 군사들과 백성들이 지켜보도록 넒은 마당에 끌어내어 둥둥둥 전고(戰鼓: 전쟁 시 치던 북)를 울리고, 올가미에 그의 목을 씌워 조여죽였다. 왕자 출신인지라 차마 칼로 찔러 피를 낼 수 없다 하여 목졸라 죽인 것이 흥안군에게 취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의 직계 가족들은 가차없이 칼로 쳐죽이고, 일가붙이, 노복들은 노예로 분배했다.

이 소식에 이괄에게 투항해 진군대장이 되었던 이흥립이 자살했고, 군관 이정배는 말단 군사에게 목이 베어져 도원수부에 도착했다. 해가 질 무렵 한 필의 군마가 갈기를 세우고 돈화문(창덕궁의 정문)으로 달렸다. 말을 탄 군관은 머리를 온통 천으로 칭칭 감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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