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고목에 녹여낸 민중들의 삶
광주시립미술관 ‘손장섭, 역사가 된 풍경’전
내년 2월 2일까지…한국 근현대사도 담아내

손장섭 화백
손장섭 작 ‘울릉도 향나무’

#강원도 삼척에서 조금 내려가면 금세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궁촌 마을을 만난다. 임금이 살던 곳을 뜻하는 궁촌(宮村)이란 마을이다. 이 마을은 비극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궁촌 마을의 서쪽 끝 작은 개울가에는 높이가 20m에 나무 둘레가 5.4m나 되는 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다. 나이는 700년에서 길게는 1천년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음나무 중에는 가장 큰 ‘왕음나무’다. 이 음나무는 왕비, 두 아들과 함께 목졸림을 당한 공양왕의 참극을 증언한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있는 향나무는 수령이 약 2천년 정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다. 천연기념물 30호인 용문사의 은행나무 보다 오래됐다. 깎아내린 듯한 절벽에서 당당하게 뻗쳐올라 있는 모습은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마을을 지켜보는 듯한 형상인 향나무는 2천년 동안 신라 우산국에서 조선 울릉도까지 모든 일을 목격했다. 그래서일까. 힘찬 붓질로 그려낸 향나무 그림은 더욱 기백이 넘친다.

숱한 전설과 사연들을 간직한 우리나라 고목들을 그림으로 만나볼 수 있는 자리가 광주광역시에 마련됐다. 광주시립미술관은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초대 회장으로 1980년대 민중미술을 이끈 손장섭(78)화백의 ‘역사가 된 풍경’전을 내년 2월 2일까지 개최한다. 전남 완도 고금면 출신인 손 화백은 민중미술의 선구적 활동을 해오면서 화업 60여년 동안 역사와 삶에 대한 애정과 우리 시대 풍경화의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다.

이번 전시는 광주시립미술관이 손장섭 60여년 화업을 선보이는 대형 전시다. 시립미술관은 매년 한국미술계와 지역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원로·작고 작가를 선정, 초대전을 마련해 그 예술적 성과를 연구 조명하고 있다. 올해는 손 화백의 회고전으로 준비했다. 이에 1960년대에 수채화로 그린 작품부터1980·1990년대에 유화를 사용한 작품, 이후 1997년부터 아크릴을 사용한 작품, 올해 그린 최신작 등을 모두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손 화백은 한국 현대사의 여러 장면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또 신목과 자연 풍경도 많이 그렸다. 이에 전시는 ▲거대한 나무-신목(神木)▲민중의 소리-역사의 창 ▲자연 풍경 등 세 분야 구성됐다.

‘거대한 나무-신목’은 수령이 2천 년에 달하는 울릉도 향나무를 비롯해 남양주 용문사 은행나무, 태백산 주목, 녹우당 은행나무와 고향 완도의 장좌리 느티나무, 이순신 장군 활궁터 은행나무 등 고목들을 화폭에 담았다. 거대한 나무들을 통해 수백, 수천 년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체취, 시련을 극복한 생명력을 웅변한다.

고목을 그린 이유에 대해 손 화백은 12일 광주에서 미술담당 기자들과 만나 “나무도 사람처럼 숱한 세월을 겪어왔습니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다를바 없습니다. 고목을 많이 그린 건 우리 역사와 삶이 깃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고 설명했다.
 

손장섭 작 ‘사월의 함성’

‘민중의 소리-역사의 창’에선 민중미술가답게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자신이 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1960년 목도한 4·19 혁명의 시위대 풍경을 그린 수채화 ‘사월의 함성’,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 출품해 화제가 됐던 ‘기지촌 인상’, 80년 5월을 그린 ‘오월 함성’ ‘역사의 창’ 시리즈 등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의미있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올해 제작한 ‘한국현대사’는 가로 9m의 작품으로 작가 자신이 겪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크고 작은 사각틀 구조에 담아낸 대서사시다.

자연풍경은 ‘땅끝에서 청산도까지’ ‘해남 땅끝’ 등 남도의 풍경을 비롯 금강산, 독도 등 우리나라 대자연을 소재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작가에게 자연은 관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 땅의 주인인 민중들의 삶, 역사의 유구함을 품은 대상으로 직접 발품을 팔아 그려낸 것이다. 무엇보다 ‘손장섭의 색’이 불릴만큼 독특한 색감인 옅은 청회색은 흰색 물감을 절묘하게 섞어 여릿한 푸른안개와도 같은 자신만의 파스텔톤의 색조를 탄생시켰다.

현재 경기도 파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손 화백에게 이번 전시는 70년대 이후 광주에서 근 50년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손 화백은 “감개가 무량하다”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전시회를 갖는 소감을 전했다.

전승보 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꺾이지 않는 나무처럼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한 시대를 살았던 손 화백의 한국미술사 업적을 기리고 예술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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