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없는 말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

박상훈

민주주의를 처음 시작한 옛날 그리스인들은 대비되는 짝이 없는 정치 언어를 잘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만 일방적으로 발설하는 것으로는 누구의 생각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강제가 아니라 설득의 방법으로 움직인다. 설득은 말의 힘을 통해 실천된다. 말의 힘은 자신과 상대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양립시키고 대조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를 대조법(antithesis)이라 불렀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당시 대조법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그리스 최고의 수사학자 고르기아스였다. 대표적으로 “두려워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표현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포함해 많은 정치가에 의해 애용되었다. 이런 그리스적 대조법은 현대 정치에서 갈등을 이해하는 데도 가치가 있다.

진보와 보수, 성장과 분배처럼 현대 정당정치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표현을 생각해보자. 이런 대조어들은 개별 정당의 이념적 특성은 물론 정당 사이의 경쟁이 어떤 내용을 갖는지를 분석할 때 유용한 지표가 된다. 진보와 보수, 분배와 성장의 가치를 둘러싸고 정당 간 갈등과 대립이 제아무리 격렬해도, 이러한 대립은 ‘민주적 가치’가 있다. 대립하는 복수의 관점과 입장은 “누가 더 공익에 부합하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공존의 틀 안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정당들이 공존하며 경쟁하는 체제를 ‘다원(多元)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나아가 복수의 다원적 이견이 경합하는 정치가 일당제처럼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체제나 권위주의처럼 이견을 억제하려는 체제보다 더 자유롭고 풍요롭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고 보수나 진보 가운데 내가 선호하는 정당만 남는 정치를 추구한다면 현실에서 그것은 전체주의 이상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정치학에서 말하는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와 무관한 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자 병리 현상이다. 민주화 이전의 비민주 체제를 흔히 권위주의라고 부른다. 반면 전체주의의 경우 민주화 이전에는 나타날 수 없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시민들 사이로 스멀스멀 스며들어 오는 것이 전체주의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멈출 수 없게 되면, 정치는 물론 개인 삶 역시 위태로워진다.

이견과 다름이 불편하긴 하다. 하지만 육체와 영혼처럼 서로 다른 원리로 이루어진 것 때문에 발생하는 불편함을 피하고자 어느 한쪽을 없앨 수 없듯, 인간의 정치에서 다름과 이견은 없앨 수 없다. 분리된 육체와 영혼을 잘 양립시켜야 인간의 덕성이 좋아지듯, 노사의 다른 관점이 인정되어야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좀 더 통합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듯, 서로 다른 정견 사이의 대조를 통해 ‘정치적 이성’도 성장하고 민주주의도 번성한다. 이견을 통해 배우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없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 반대할 수 없는 말은 좋은 정치 언어가 될 수 없다. 박정희정권이 앞세운 ‘구악일소’나 전두환정권의 ‘사회정화’를 생각해보자. 누가 구악이 일소되고 사회가 정화되는 것에 반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반대할 수 없는 말로 실제 한 일은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이었다. 박근혜정권이 동원하고 문재인정권이 이어가고 있는 적폐청산은 어떨까? 적폐청산에 반대할 수 있을까? 대조어가 없는 말, 그래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없는 말, 반대하면 적폐 옹호나 방조세력이 되는 말이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변화를 가져올까? 최근에 보듯, ‘항명’과 같은 군사주의적 용어가 동원되는 것은 어떨까?

대조어가 없는 정치 언어는 적대를 양산한다. 싸움의 본능만 자극할 뿐, 자신의 논변을 대조적으로 더 설득력 있게 만드는 노력은 안 하게 한다. 자신을 성실하게 돌아보는 윤리적 성찰의 힘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동료 정치인, 동료 시민 사이의 우애나 정중함 또한 사라지게 한다. 상대를 아프게 할 싸움을 하는 동안 표정은 어둡고 암울해진다. ‘시민을 웃게 만드는 정치’가 아니라 ‘비열한 웃음이 지배하는 정치’만 남는다. 공동체의 분열과 증오의 가속화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긴 쉬워도 치유는 어렵듯, 한번 분열된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원한과 복수심을 자극하는 정치’를 계속할 것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대조법의 정치 언어를 중시한 것과 관련해, 오늘날에도 돌아볼 점은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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