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조명 <4>담양 제주양씨 창암종가

종가 대표 인물 양산보 뜻 이은 도학과 절의 터전 '소쇄원' 
英 여왕이 가보고 싶어 한 ‘명승’
두번 방화 피해로 종택과 보물 유실
명승 가치 복원으로 세계유산 추진도
 

소쇄원 연못에서 본 광풍각과 제월당

한 마을을 둘러싸고 명승이 3곳이면 그 무엇이 부럽겠는가? 소쇄원(명승40호), 환벽당(명승107호), 식영정(명승57호)은 반경 1㎞내에 마주보고 있는데 이 3곳의 명승을 끼고 흐르는 물길이 ‘증암천’이다. 전남 담양 지곡리와 광주 북구 충효동을 가로지르는 이 천은 독수정·소쇄원·취가정·환벽당·식영정·학구당·창평향교 옆을 지나 봉산면의 송강정과 면앙정 아래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 문화유적 만큼이나 수많은 인물의 희노애락이 스며 있다. 물길 따라 백일홍이 만개한 시절에는 강물에 비친 무등산과 성산이 붉은 꽃잎으로 채색되어 시상에 젖게 하는 아름다운 강산이 된다. 제주양씨 창암종가가 이곳에서 명승 소쇄원을 지켜낸 내력을 알아본다.

◇학문 발전과 문화창달 중심

제주 양씨 창암종가를 대표하는 인물은 소쇄원을 창건한 양산보(1503~57)다. 양산보의 부친 양사원이 광산구 서창(당시는 나주 복룡)에서 창평 창암촌으로 옮겨와 종가를 열었다. 모친이 신평 송씨이기 때문에 양산보는 면앙정 송순(1493~1582)과는 이종형제 관계가 된다.

16세기 호남사림의 활약은 르네상스에 비유된다. 그 비약적인 학문 발전과 문화 창달의 한 가운데에 소쇄원 주인 양산보가 있다. 김종직·김굉필 등 사림의 스승에 대한 부관참시와 사간원 폐지 등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중종을 옹립해 왕도청치로 태평성대를 꿈꾸는 사림의 관계진출이 시작되었던 때다.

15세의 어린 양산보도 숙부 양팽손(1488~1545)의 천거로 조광조에게서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를 이념으로 한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 사림파의 계보를 잇고 개혁정치를 주도한 유력 정치가다.

1519년에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던 수많은 개혁 추진 인재들이 죽임당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가서 사약을 받기까지 곁을 지키고 시신을 수습한 후 사당까지 세운 사람이 양팽손이었다. 양산보도 함께 했다.

몰아친 칼바람은 사림파를 겨냥했고 비록 살아남았더라도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학포 양팽손, 눌재 박상, 석천 임억령 등이 낙향했다. 훗날 사림이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을 때 양산보는 수차례 자신에 대한 천거를 사양했다. 산과 물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명사들과 선비의 도리를 연구하는 일에 정진했기에 그를 ‘소쇄처사’라 부른다.

양산보가 25세 전후에 공부를 위해 작은 정자(小亭)를 지었는데 지붕을 풀로 덮은 초정(草亭 )이었고 이것이 소쇄정이다. 양산보의 부인은 광산 김씨인데 이때 상처했다. 처남 김윤제(환벽당 주인, 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성원의 스승)와 가까이 지냈다. 소쇄원은 이때부터 수십년 동안 소각, 소교, 연못, 오동나무, 매화, 대나무, 담장 등 거대한 원림 수준의 정비와 확장이 이루어졌다. 증축에 소요되는 재물은 이종형제 송순과 처남 김윤제가 지원했다.

‘소쇄원’ 명칭은 면앙정 송순(1493~1582)이 전라감사 시절인 1542년 창평을 순찰하며 지은 시 ‘소쇄원 가랑비 속에 매화를 찾아보다’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다. 소쇄처사 양산보가 병으로 세상을 떴을 때, 고경명이 제문을 짓고, 김인후, 송순, 임억령, 양응정, 기대승이 만장(공덕을 칭송한 글)을 지었다. 기라성 같은 호남사림의 명문장가들이 글로써 애도했다.
 

비가 그치자 활짝 핀 소쇄원 매화
면앙정 송순이 ‘소쇄원 가랑비 속에 매화를 찾아보다’라는 시에서 소쇄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동양사상 곳곳에 스민 한국대표 원림

소쇄원 초정 옆에는 벽오동(오동나무)이 있다. 태평성대의 상징인 봉황이 벽오동 열매를 먹기 위해 깃든다는 전설에 따른 조경이다. 강력한 군주의 인위적인 통치가 없는 자연스런 세상이 성리학적 이상국가다. 도가의 소국과민과도 같은 요순임금의 태평세상을 그려보고 있었다. 유교적 복고주의를 따르던 호남 사림들이 무수한 문장으로 펼쳤던 동양사상이 소쇄원에 메아리친다.

소쇄원에는 자연과 건축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 한국의 대표 정원이라 인정받고 있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도 1999년 방한 때 소쇄원에서 숙박하기를 희망했으나 열악한 여건 때문에 안동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고 한다. 창덕궁 비원,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정을 한국 3대 정원이라 하지만 민간 정원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 소쇄원이다.

◇‘소쇄원도’ ‘창암촌도’ 명문장 전승

현재 소쇄원 매표소 뒤 농가 위치가 ‘창암촌’이 있던 곳이다. 창암종가는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고 다시 일제하에서 민족말살정책의 희생양으로 두 번 불탔다. 2003년 15대 종손 양원로씨(삼육교육신문 발행인)가 일본 황실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건네받은 문서에서 ‘창암촌도’를 발견함으로써 창암종가 복원의 꿈에 다가서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재청과 전라남도가 창암촌 복원 사업을 추진할 준비를 마쳤다.

목판으로 제작된 ‘소쇄원도’는 1984년 도난당해 국가 차원의 보존 방안 마련이 절실하다. 양재혁 창암종가 16대 종손은 “집안에서 ‘소쇄처사 양공지려’라고 쓰인 담장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은 담장 뒤에 묻힌 신주 때문이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사당을 불태우고 증조부를 독살했던 이후로 복원하지 못했다. 이제 창암촌을 복원한다고 하니 가치를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창암종가가 보존했던 여러 보물들이 돌아오고 죽염주 등 종가음식도 빛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정현 뉴미디어본부장 sjh@namdonews.com  사진제공 /양재혁 창암종가 종손
 

소쇄원의 산수유꽃이 봄을 알린다.

광풍각과 제월당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은 마치 비갠 뒤 햇볕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 떠오르는 달빛과 같다[胸懷灑落如光風霽月]”고 한 송나라 황정견의 글에서 ‘광풍’과 ‘제월’을 차용한 것

목판‘소쇄원도’. 목판 상부의 한시는 김인후선생의 ‘소쇄원48영’
일본황실도서관에서 되찾은 ‘창암촌도’
창암종가 종택은 현재의 매표소 뒤 농가 자리에 위치했으며 대숲 밖엔 황금정이 있었다.
소쇄원 초정 아래로 나무 홈통을 뚫고 흐르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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