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7> 장흥 장흥위씨(長興 魏氏) 웅천공파 종가 / 존재고택

시대와 경계 너머 혁신을 이끈 명문 집안
신라 8학사 위경, 가문의 시조
고려시중 위창주 중시조 34대
실학자 위백규, ‘만언봉사’ 제안
정조 발탁 옥과현 선정으로 화답
방촌마을 규약 준수 가르친 가훈
 

존재고택 사랑채에서 본 천관산
존재위백규 동상
존재고택 사랑채. 위문덕과 위백규의 호가 ‘영이재’, ‘존재’라는 현판으로 걸려 있다.
천관산 장천8경 앞에 있는 장천재. 위씨 집안과 지역의 후진들을 양성하는 강학당이었고 유림 문인 학자들이 교유하던 곳이다.
문간채에서 바라본 옥련정과 천관산
효자송(천연기념물 제356호)
전남 장흥군 관산읍 당동마을에 있는 해송으로 높이 12m, 밑둘레 4.5m, 너비 장축 26m에 이른다. 1836년 위윤조가 부모님 휴식을 위해 심어 ‘효자송’이라 부른다.

백두대간 호남정맥 남쪽 끝 봉우리가 전라도 영산 천관산(天冠山)이다. 하늘 왕관을 쓴 듯 굽어보는 천관산 자락에 신라에서 현대까지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켜 온 명문가 장흥 위씨(長興 魏氏)가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삶)했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마을에 있는 장흥위씨 웅천공파 종가의 유래와 유산을 통해 시대와 지역경계를 초월한 혁신의 지혜를 살펴본다.

◇ 신라 8학사 위경, 가문 열어

신라 선덕여왕의 초청(638년)으로 당태종이 파견한 문화사절단 8학사 중 위경이 신라 아찬을 역임하고 위씨 가문을 열었다. 고려 인종비이고 의종·명종·신종 등 세 왕의 모후인 공예태후 임씨의 탄생지라는 이유로 원종 때 장흥부를 회주목으로 승격시키면서 위경을 회주군에 봉군했다(1265년). 기록 없는 약 298년간을 건너 뛰어 고려 시중 위창주를 중시조로 장흥위씨 대동보는 기록한다.

성균관 진사 위곤(위창주의 20대손, 1515~1582)이 장흥 관산 당동마을 공예태후 임씨의 생가터에 살았다. 위곤의 다섯아들, 판사 덕홍, 청계 덕의, 운암 덕관, 호조판서 덕화, 안항 덕후가 각파로 번성하여 현재 장흥 위씨 후손의 60%를 차지한다.

5남 위덕후의 둘째아들이 웅천현감을 지낸 위정렬(1580~1656)이고 웅천공파를 연 종가조(宗家祖)다. 웅천공 위정렬의 증손자가 영이재 위문덕(1704~1784)이고, 그의 아들 위백규(1727~1798)의 호를 따라 종택을 존재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61호)이라 부른다.

◇ 가학 교육이 낳은 천재 위백규

명문가 교육은 수려한 장천팔경 옆 장천재(전라남도문화재 제72호)에서 이뤄졌다. 위백규는 6세에 글을 짓고, 8세에 대학·주역을 공부하고, 10세에 제자백가를 섭렵하고 천문·지리·복서·율력·병법·의약·관상학·기술까지 꿰뚫었던 천재다. 17세부터 강학을 했다. 25세에는 충청도에 있던 병계 윤봉구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에 몰입했다. 존재공은 41세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종가 옆에 지어 경세의 방책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존재 위백규는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이후 호남의 대학자라는 평이 있다. 존재공이 폐정 개혁 방책을 제시했던 저서 ‘정현신보’는 목민심서와 비교되는데, 후대 실학자 정약용의 유배지도 옆 고을 강진이었다.

◇ 정조 감탄 ‘만언봉사’ 상소문 보물

어사 서영보가 천거했고 정조는 명을 내렸다. 1794년 위백규 저서 24권을 바치게 하고 그를 불러들였다. 정조에게 올린 정책건의서가 ‘만언봉사’다. 정조는 공의 해법에 찬성하면서 “그대의 건의를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는 요지의 답서를 내렸다. 옥과현감에 발탁하여 향약을 설치하고 학문을 권장하고 무예를 가르치며 폐단을 시정하는 선정을 펼쳤다.

만언봉사에는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시라, 어진 사람을 발탁 등용하시라, 염치를 장려하고 기강을 회복하시라, 선비의 습관을 바르게 제어하시라, 탐관오리를 의법처리하시라, 옳은 제도 살려내고 폐단 법제 고치시라” 등 여섯 강령에 대한 실천 논리가 제시돼 있다. 어전에 바쳤던 저서들과 ‘환영지’(1758) 등을 모아 ‘존재전서’가 1974년 발간됐다. 정조 친필 ‘만언봉사비답’ 등은 마을 입구의 방촌유물전시관에 보존돼 있다. 천관산 역사·문화·지리 기술서 ‘지제지’, 폐단과 개혁방책을 논한 ‘정현신보’ 등이 종가의 보물이다.

◇ 존재고택에 전하는 종가 이야기

종가는 “행동 삼가, 친족 돈독, 어른 공경, 집안 화목, 후손 교육, 경조 중시, 향약 엄수”를 가훈으로 한다. 사치를 경계하고 베풀어 봉사하는 전통이 종가에 전승된다. 방촌마을은 고려시대 회주목 치소(장흥 통치기관)였고, 산성으로 둘러싸인 전통문화마을이다. 존재고택에는 안채, 사랑채, 사당, 문간채, 헛간채, 행랑채, 우물터, 장독대 등이 잘 보존돼 있다. 옥련정에는 공부를 방해하는 개구리를 부적으로 퇴치했다는 설화가 있다. 101세 되신 노종부를 모시고 위재현(65) 종손 부부가 존재고택을 관리하고 있다. 글·사진/서정현 뉴미디어취재본부장 sjh@namdonews.com

정조의 친필 ‘만언봉사 비답’은 방촌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웅천공파종가 종손 위재현 제공
위백규의 ‘환영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리서이며 팔도지리지를 포함하고 있다./웅천공파종가 종손 위재현 제공

<영상설명> 효자송을 설명하는 위황량씨(94세). 1948년 약국 개업 후 36년만에 아들에게 물려 준 약사다. 그후 36년 신생약국은 변함없이 관산 주민의  병통을 달래고 있고, 그는 장흥지역과 위씨 가문의 크고 작은 보물들을 빛나게 하는 공적을 쌓아 오늘에 왔다. 장흥위씨 가문의 가학 교육에 따라 5~6세 때부터 동몽선습, 소학 등을 4년 배우고 학교에 갔다. 학정 이돈흥에게 서예를 사사받아 서예 추천작가, 초대작가가 되었다. 장흥향교 31대 전교로서 장흥과 관산 일대 문화유산 발굴ㆍ보존에 헌신했다. 위씨는 현재도 장흥위씨 가전의 문서고와 문화재들을 관리하고 있다. 효자송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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