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나주 나주임씨(羅州林氏) 대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선비정신…빛나는 대종가
고려 대장군 임비 가문 원조
‘두문동 충신’ 임탁 가문 열어
영모정 임복 희경루 주인공
시인 임제 민족자주사상 펼쳐
정유 의병장 임환 부인양씨 순절
‘호남제1명촌 회진’ 동계 기록
‘회진개혁청년회’ 항일운동

나주임씨 대종가 전경. /임경열 전 나주문화원장 제공
나주임씨 대종가 안채.
희경루방회도의 주인공 임복(상석 좌측), 중앙이 광주목사, 우측이 전라도관찰사다. 과거급제 동기생들이 20주년을 기념해 여는 잔치를 ‘방회’라 하는데 참석자 이름과 장소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장소는 광주 희경루인데, 이 그림은 보물 제1879호로 지정되었고, 정부에서 희경루 복원을 추진 중이다.
풍호언덕 영모정에서 본 영산강. 가야산 좌측에 영산포가 보이고 가야산 우측 뒤로 월출산이 보인다. 나주임씨 대종가는 고대사의 중심거점이었던 국제포구 회진에 세거하면서 영산강물처럼 24대를 이어 품격 높은 학문전통과 민족정기를 굳게 지켜온 명문가다.
임제의 물곡사 비

사방 팔방 오랑캐들도 모두 스스로 황제라 일컬으며 부르는데 四夷八蠻 皆呼稱帝

유독 조선은 중국이 들어와서 주인 노릇하니 唯獨朝鮮 入主中國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며 내가 죽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我生何爲 我死何爲

(그러니 내가 죽어도) 곡하지 말라 勿哭

노령산맥 서남쪽의 금성산과 신걸산 자락이 영산강과 마주하는 곳,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회진’. 2천년 역사문화의 보고인 ‘호남제일 명촌 회진’에 터를 잡아 630여년 대대로 인걸을 배출한 나주임씨 대종가(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33호)를 찾아 웅혼한 기상을 삶의 족적으로 남긴 인물과 보물들을 살펴본다.

◇고려 대장군 임비 9세손 임탁 회진 입향

고려 충렬왕을 호위해 원나라에 다녀와 대장군까지 오른 임비가 나주임씨 가문의 원조(元祖)다. 충렬왕이 유라시아 대륙의 황제 쿠빌라이칸의 사위가 되어 여몽연합군을 편성하고 일본정벌에 나섰던 시기에 동아시아를 누빈 고려 무장이 임비다.

임비의 9세손 임탁은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세우자 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 충절을 지켜 두문동에 은거했다. 1393년 고대 영산강의 국제포구였던 회진으로 입향해 대종가를 열었다.

◇임평 아들 임붕, 승지 역임 가문일으켜

정몽주, 이색 등과 교유했던 임봉(임탁의 아들)은 유훈을 내렸고 이후 3대가 벼슬에 나가지 않았는데, 임봉의 현손인 임평(1462~1522)이 무관으로 병마우후를 역임해 가문을 일으킨다. 임평의 아들 임붕(1486~1553)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태학관 대표로서 유생 250명을 이끌고 기묘사화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주출신 유생 11인이 함께 낙향해 금강계를 조직하고 금사정(나주 왕곡 송죽리)을 세웠다. 이후 임붕은 광주목사, 승지까지 지내며 가풍을 마련했다.

◇처사 임복, 효제 상징 영모정 세워

임붕의 차남 임복(1521~1576)은 동생 임진(1526~1587)과 함께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는 뜻으로 ‘영모정’을 세웠다. 임복이 광주광역시가 복원을 준비하는 ‘희경루방회도’(보물 제1879호)의 주인공이다. 행장비문에 따르면, 왜적에 대비해 철갑선(거북선)을 축조하자는 ‘변사의10조’를 올려 선조가 가납(시정 권고를 받아들임)했다고 한다. 동생 임진은 무과에 나가 병마절도사에 오르고, 제주목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가 됐다.

◇청백리 임진, 아들 천재 5형제

임진의 아들 중 임제(1549~1587)는 조식, 서경덕과 교유하던 성운(1497~1579)의 제자로 속리산에서 공부해 예조정랑, 홍문관 지제교까지 역임했다. 호방한 성격에 얽매임을 싫어해 관직을 버리고 검과 피리, 술과 여인을 즐기며 전국을 유람하다 39세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한문소설 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과 우화소설 ‘서옥설’, 백호집 7백여편의 시는 그의 민족자주와 애민사상을 드러낸 훌륭한 명작으로 평가된다. 백호문학관(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소재)에서 느낄 수 있다. 임제의 동생 임환(1564~1608)은 김천일 장군 종사관이고, 정유재란 진사군을 이끈 의병장이다. 부인 양씨의 의로운 순절을 기려 제주양씨 정려(나주향토문화유산 제36호)가 보존되고 있다. 일가를 태운 피난 배가 풍호나루에서  몽탄으로 향할 때 왜군수군에 마주쳤고, 자신이 인질되어 일가를 보내고 난 후 멀어지는 가족에 작별하겠다고 뱃머리에 나와  영산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

◇자부심으로 전승되는 종가 이야기

대종가는 ‘심지는 청백하게 하며, 처신은 삼가 겸손하라’는 ‘청고근졸’ 가훈에 따라 24세손까지 630년을 이어오고 있다. 일제 하에 회진개혁청년회를 조직, 1934년 영모정에서 항일 연극을 공연하다 체포돼 탄압을 받았다. 종가 소유의 서남해 연안 도서 간척 토지는 소작 곡수를 받으러 가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았기 때문에 최근까지 옛 소작인들이 어산물을 선물한다고 한다. 종가의 근현대 인물로는 국회의장 임채정, 명창 임방울, 영화감독 임권택, 보해양조 창업주 임광행 등이 있다.

임경열 전 나주문화원장은 “복암리고분과 함께 드러나는 회진의 찬란했던 역사를 통해, 영산강 민초들의 삶을 뿌리삼아 아시아로 뻗어갔던 민족자존의 발자취가 더욱 명백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마한·백제 고대 영산강 신비 벗겨지나

영산강 영산포로부터 5㎞ 하류쪽에 있는 풍호나루는 통일신라시대 사신·유학승들이 당나라를 오갔던 서해남로 최대 바닷길의 국제포구였다. 풍호나루는 마한에서 조선까지 1천년 간 영산강 중류 일원을 통치하는 관아와 토성이 있었던 행정 군사의 중심지 회진에 속한 포구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남쪽만 영산강이 가로막고 있으니 천혜의 요새다. 지형을 살려 토성을 쌓고 능선을 산성으로 이어 2.4㎞의 회진성(전라남도기념물 제87호)이 발굴됐다. 회진성 사람들의 장례묘역이 복암리고분들이다. 고분에서는 1세기 중국 신나라 화폐(화천)가 출토되고, 대가야, 일본, 백제와의 교역 유물들이 나왔다. 마치 아파트묘지처럼 여러 옹관묘 위에 여러 석실분이 시대를 달리해 층층이 조성된 유적이 출토됨으로써 옛 마한과 백제 문화의 단면을 알 수 있게 됐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영모정.귀래당 임붕을 위해 임복, 임진,임몽이 설립한 정자로서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는 의미로 영모정이라 부른다.
영모정이 있는 풍호언덕. 푸조나무 등 수령 400년 된 고목 11그루가 영모정을 둘러싸고 단 아래에는 귀래정임붕유허비, 백호 임제선생 기념비, 회진개혁청년회기념비, 백호임제선생 시비 등이 세워져 있다.
풍호샘. 오랜세월 회진 입구를 지켰던 풍호샘이다. 샘 뒤로 보이는 언덕이 회진성을 지키는 망루가 있던 곳이며 잠애산 서족 사면에 복암리고분유적이 있는 곳이다. 망루언덕 아래로 산성으로 막고 사직단이 있었다는 사직마을, 회진토성 남문터를 비롯 행정 군사적 시설들이 있던 터와 유적위치가 발굴조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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