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62)
6부 3장 유흥치 난(562)

유흥치는 상원 현에 도착하여 군사들을 조선 수군 복장으로 갈아입히고 풀었다. 그들은 민가로 들어가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죽였다.

“우리는 정충신의 조선 수군이다.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에이 못된 놈들! 니놈들이 우리 장수를 모함하고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려는 수작을 모를 줄 아느냐.”

상원 현감 김적이 달려들어 항의하자 유흥치 군사의 부장이 단번에 칼을 빼들어 그를 찔러 죽였다.

“너희 놈이 뭐라 하건 우린 정충신 군사다. 우리는 조정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물자 징색(徵色:徵求討索의 준말로 돈이나 곡식 따위를 강제로 요구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 죽는 줄 알아라.”

백성들은 정충신 군대가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도 끽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중화의 대장(代將) 양덕위가 일을 저지르고, 정충신 진영으로 달려들어왔다.

“장군, 노략질을 일삼는 중국 병사들을 공격하여 17명을 살상했습니다.”

“장하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유흥치가 알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소인을 처벌하자는 주장이 거론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귀관을 살인죄로 처벌한다면 명의 한인들이 기고만장하여 더욱 난동을 피울 것인데, 처벌한다고? 내가 그대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내 곁을 지키라.”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인근 백성들이 자신감을 갖고 배를 갖고 들어온 중국인들을 습격했다. 조선 백성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정탐꾼을 통해 안 유흥치가 모함의 말을 퍼뜨렸다.

“정충신이 후금 왕자들과 밀수 거래를 하면서 거금을 챙겼다. 돈을 챙긴 것은 조정을 칠 거사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반대의 일이었다. 후금과 밀수 거래를 한 사람들을 잡아족치고, 후금에게도 부당한 상거래 대신 협정에 의한 정상 무역을 요구해 관철시켰던 것이다. 유흥치의 모함은 유치했으므로 그는 부하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신임을 받지 못했다.

1631년 3월, 유흥치는 요동으로 귀환하라는 명을 받자 도망을 쳤다. 그가 저지른 일이 있는데 돌아가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보물을 챙겨 도망을 가는데 부하 장도와 심세괴가 단박에 달려들어 칼로 그의 가슴을 갈라 오장육부를 꺼내 밟아버리고, 머리를 잘라 명나라로 보냈다. 그의 머리와 함께 보자기에 싸여서 보내진 서찰은 다음과 같다.

-역도 유흥치는 가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후금과 내통하여 투항을 시도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더많은 희생이 요구되어 부득이 죽여서 수급을 보낸다.

유흥치의 죽음은 세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첫째는 정충신의 압박 작전에 군기가 해이해져 밀리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명나라 역시 모문룡보다 더한 그의 탐욕을 용서치 않았으며, 셋째 명과 조선과 후금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 그를 후금이 묵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유흥치를 죽였다는 이유로 명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그대들은 목의 가시를 제거했다. 나의 힘이 컸다. 가도는 우리가 관리하겠다.”

난감한 일이었다. 가도는 지금 명의 심세괴가 장악하고 있다. 이때 후금이 가도에 들어가면 대결이 불가피하고, 본래 땅의 주인인 조선과 함께 삼국전쟁을 불러올 것이다. 가도는 두고두고 골치를 앓고 있었다.

유흥치 집권기(1630년 4월~1631년 3월), 가도 세력의 동향은 유흥치의 난, 유흥치와 후금의 동맹, 후금과의 동맹 파기, 심세괴 난 등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유흥치는 모문룡 처형 후, 가도 관리자인 진계성을 살해하고 독립 세력이 된 다음에 후금과 동맹 노선을 취했다. 이 과정이 유흥치의 난이다.

유흥치는 1930년 7월 후금과의 동맹을 성사시키고, 명나라 조정에는 이를 숨겼고, 그러나 명은 그를 의심한 나머지 군량과 무기 지원을 중단했다. 유흥치는 대신 조선에 식량원조를 협박했다. 조선은 내 땅 빼앗기고, 식량마저 대주는 수모를 겪었지만 쩔쩔 맬 뿐 대처하지 못했다. 정충신이 안팎의 온갖 음해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맞서 나가자 그는 결국 자멸의 길을 갔고, 끝내 심세괴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는 직접적으로 심세괴의 반란 때문이지만, 정충신의 군사적 압박의 힘도 컸다. 전라도 첨방군과 전라도 수군이 버팀목이 되었기에 유흥치를 자멸시킨 것이다. 그런데 더 큰 혼란이 오고 있었다. 힘의 진공상태를 메우려는 각축이 벌써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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