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보성 성주이씨(星州李氏) 참의공파 종가 / 가내마을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1촌3학당 박사마을…살아 숨쉬는 시대정신
명문장은 성주이씨 가문의 자부심
은둔 학자 이성, 보성 문덕 입향
1만권 서책 모아 3학당 설립
구빈하고 구국한 빛나는 인물들
4대 문집 의로운 행적이 가보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라마난
다정(多情)도 병(病)인 냥하여 잠 못드러 하노라
-매운당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

(하얀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은하수가 흐르는 깊은 밤에
꽃가지에 깃든 봄의 정서를 두견새가 알고 저리 울겠냐만은
다정다감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白鷺)야 웃지마라
것치 거믄들 속조차 거믈소냐
아마도 것 희고 속 검을슨 너 뿐인가 하노라
-형재 ‘이직’의 <오로시烏鷺詩>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희고 속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보성 문덕면 주암호 수변의 ‘대원사가는 길’. 아름다운 주암호 인근의 가내마을에 보성 성주이씨 참판공파 종가가 있다.
가내마을 입구의 서재필기념공원에서 보이는 주암호.
성주이씨 참판공파종가 종택의 전경

전남 보성 문덕면 주암호 지류의 무등산 동남사면이 보이는 가내마을은 성주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서 11대를 이어온 성주이씨 집안은 고려, 조선의 명문장가였던 선조들의 후예답게 4대가 문집을 남겼으며, 빈민 구휼과 구국의 행적으로 빛나는 가문이다. 한 마을에 학당을 셋이나 세우고 1만권 서책을 공유하며 수많은 박사를 배출한 전통을 가문의 보배로 여긴다. 아름다운 곳에 살며 아름다운 생각을 문장으로 남긴 문사 집안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들어본다.

◇ 성주 호족 이장경 가문 열어…이조년 명문장 ‘이화에 월백하고’

성주 이씨 가문은 신라 문성왕 때 재상 이순유를 시조로 하고, 그 11대손 이장경이 고려 고종 때 경북 성주의 호족으로 가문을 열어 중시조가 됐다. 이장경의 과거급제한 다섯 아들 중 5남 이조년(1269~1343)이 대제학에 올랐고 ‘다정가(多情歌, 이화에 월백하고)’를 지은 문장가다. 이장경의 차남 이천년의 아들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공적을 쌓아 조부를 농서군에 봉하게 하고 농서이씨를 열었고, 임진왜란 명나라 지원군 대장 이여송(1549 ~ 1598)이 그 후손이라 한다.

◇고려 명문가에서 조선 공신가로…‘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이조년의 증손자 이직(1361~1431, 호는 형재)은 태조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고,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적으로 두 번이나 공신이 됐다. 세종까지 네 임금을 모시며 대제학·영의정에 올랐으며 ‘오로시(烏鷺詩, 가마귀 검다하고)’를 남겼다.
이직의 7대손 이성(1562~1629)은 강항, 조헌, 이항복, 안방준 등과 함께 기호학파의 태두로 알려진 우계 성혼 선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중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출사건이 일어나자 보성 출신 안방준(1573∼1654)을 따라 보성 문덕에 은거(隱居, 세속을 떠나 수행함)했다.

◇ 3학당 세워 호남학자 초빙…1촌 27박사 배출한 교육전통 자부심

이직의 12대손 이국진(1738~1781)은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고 이조참의에 추증돼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를 열었다. 이국진의 아들 이유원(1763~1835)이 망일봉 아래 명당 가내마을에 터 잡아 종가를 이었다. 이유원의 아들 이기대(1792~1858,호는 가은)는 1만여권의 서책을 갖추고 가은당, 천상재, 일감헌 등 세 학당을 설립했다. 추사 김정희, 노사 기정진, 면암 최익현 등 학자와 선비를 초빙해 학문을 연구케 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흉년에는 양곡을 내어 구휼하고 향약을 조직해 환난을 대비했다.

◇ 목민관 이지용 빈민구휼 조선에 빛나…독립신문 선구자 서재필 키워

이기대의 장남 이지용(1825~1891, 호는 소송)은 금부도사, 석성현감 등을 지내며 청백한 목민관으로 알려졌다. 벼슬을 사양하는 보성의 진사로서 가재를 털어 빈민을 보살핀 사실이 임금에 보고돼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됐다. 노사 기정진은 글로써 그의 행적을 찬미했다. 이기대의 5녀가 서광언과 혼인했다. 동복현감으로 있던 서광언의 부인 이씨가 친가에 와서 낳은 아이가 서재필(1864~1951,독립운동가)이고, 종가는 서재필 박사가 나고 자란 생가가 된다. 주암호에서 가내마을로 향하는 입구에는 서재필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지용의 아들 이교문(1846~1914, 호는 일봉)은 노사 기정진의 휘하 호남의병장이고, 아들 이일(호는 소봉)은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 항일의병의 조총을 공급하는 등 의로운 가문의 빛나는 인물이었다. 이기대와 자손 4대가 각자 학문의 발자취로 문집을 남겼으니 ‘가은실기’, ‘소송유고’, ‘일봉집’, ‘소봉집’등이고, 이를 가문의 보배로 여긴다. 가내마을에는 박사 27명을 키운 자부심이 흐르고 있다. 대대로 명문장을 배출한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는 영의정 이직이 내린 가훈 ‘검소함’을 지키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참판공이유원의 장남 이기대가 서책 1만여권을 비치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가은당 전경.
마을에는 천상재, 일감헌 등 세 학당이 있어 후학을 양성한 전통으로 인하여, 서재필 박사 등 27명의 박사를 배출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종가의 초당. 가은공 이기대의 외손자 서재필(독립운동가)이 태어난 곳이며, 종택이 국가보훈시설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 이조년이 쓴 ‘다정가’ 시비. 다정가는 고려 시조 중 가장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가내마을 입구의 성주이씨세거비에 새긴 ‘이직’의 '오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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