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식 광주 일동중 교장의 남도일보 화요세평
독수정에서 만난 사람
김홍식(일동중 교장·광주국공립중등교장회장)

광주호를 지나 가사문학면 소재지인 연천마을을 뒤로하고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넌다. 푸른 산그늘을 안고 흐르니 예전의 창계천(蒼溪川)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곳. 문득 청청한 군락이 하나의 큰 그늘로 앞길을 막는다. 무등산에서 북동쪽으로 힘 있게 달려온 산자락 하나가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자리를 만든 쉼터, 산음동(山陰洞)이다.

원림으로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 오른쪽으로는 대숲이 있고 왼쪽으로는 소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서어나무 등이 하늘을 덮고 있다. 며칠 뒤 경쟁적으로 솟아날 죽순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손에 힘이 생긴다. 올봄에 새로 난 잎들의 연두색 고운 빛깔도 완연하게 짙은 색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고개를 숙여서 자상한 눈길을 주어야만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꽃들도 정자에 오르는 돌계단 주위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계절의 몫을 다하고 있다. 어김없이 시간의 약속을 지켜내는 저 작은 풀꽃들이 더없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구처럼.

독수정(獨守亭)! 무등산권에 있는 정자 중 그 연원이 가장 오래된 곳이다. 우리 고장 정자 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자는 그 향배부터가 특이하다. 북향이다. 송도를 향해 일부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우리 고장을 특별히 의향이라고 한다. 우리 땅, 우리 정신을 지키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조상들의 행적이 넘쳐났기에 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그러한 정신의 숭고한 발원지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이 정자가 우리 고장 사람들에게 단순한 정자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곳이라고 생각한다. 도피와 은둔이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추상같은 표상으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정자의 주인인 서은 전신민을 상상으로 만나본다. 문득 단정하게 조복을 갖춰 입은 한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에 쓴 복두 양쪽으로 하얗게 센 머리가 선연하다. 북쪽을 향해 연신 노구를 굽혔다 일으키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뼛속 깊이 배어 있는 비통한 심사가 그 몸짓 속에 소리 없는 통곡으로 묻어나고 원림의 산새들은 혼신을 다해 이를 자신들의 언어로 바꾸어 전하기에 봄날이 짧다. 무엇인가 기어이 지키고자 하는 단심의 기상이 역력하다.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원림의 자양분이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랬구나! 긴 세월을 뛰어넘어 그 정신 그대로 오롯이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게 하는 동력이었구나. 붉디붉은 꽃물로 전라도 남쪽 산하를 진하게 물들여 놓은 저 마음이었기에 결코 그 무엇으로 지울 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았구나.’

그는 정몽주와 절친한 사이였다. 선죽교에서 포은의 비참한 죽음은 곧 고려 왕실의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 표지였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망국의 지경에서 그 이상 무엇을 바라랴! 아들과 함께 낯선 길을 걷고 걸어 남도의 궁벽한 이곳까지 내려와 서석산 산그늘에 자신과 세상을 통째로 감추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죽지 못하고 달아난 신하’라는 뜻의 ‘미사둔신(未死遯臣)’이라 자학하며 이곳 남녘땅의 외로운 서은(瑞隱)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등지고 끝까지 홀로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결코 변할 수 없는 그 마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단심(丹心)이었다. 새로운 권력의 부름을 외면한 채 무등의 품에서 은둔의 둥지를 틀고 임을 향한 붉은 마음을 굳게 지킨 서은 전신민의 꼿꼿한 의기가 원림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송두리째 무너진 고려 왕실의 스산한 주춧돌을 반추하며 되살아나는 지난날이 이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마음 그대로 유지하다가 다음 세상의 부름을 받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서은은 엄연히 살아 있고 해를 거듭할수록 독수정 원림도 더욱 푸른빛을 더해 가고 있다.

‘후인이 이 정자에 오르면 부끄럽지 않으리’라는 한 시인의 시구가 새롭게 다가온다. 후세들 앞에 당당하고자 했던 독수정의 서은은 우리에게 하나의 거울이다. 역사와 국민 앞에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은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권력과 시류에 편승하며 비굴한 처신을 일삼는 사람들이 5월의 독수정을 찾아서 서은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한번 비춰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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