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93)
6부 4장 귀양

“이제 조선은 다시 전쟁 직전의 위기로 몰렸다. 저 야생마같은 오랑캐 군사 무리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후금의 수 만 기병부대는 천하무적으로서 조선 땅을 초토화할 것이고, 홍타이지라는 거친 사나이가 들이닥치면 산천초목이 떨 텐데, 뚜렷한 준비도 없이 어떻게 그들을 막아낸단 말인가.”

정충신은 그럴수록 김대건이 가지고 간 국서의 내용을 고쳐서 보내지 못한 것을 거듭거듭 후회했다. 어떻게든 위기의 나라를 건지고 보는 것이 중요한데 삿된 자존심과 자만심으로 상대국의 부아를 돋궈버렸으니, 재앙을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절차를 밟는다고 임금에게 국서 수정을 알리는 상소문을 올렸더니 당장에 왕명을 거역한 배역자로 몰려 한 사람은 영월로, 또 한 사람은 당진 땅 깊은 물골에 쳐박혀버렸다.

며칠 후 아들 빙이 한양으로부터 내려와 이조판서 최명길의 편지와 조보를 가져왔다. 최명길의 위안 편지가 마음을 다독였으나 조보를 보자 정충신은 쿵 가슴이 무너져내린 좌절감을 느꼈다.

조보에는 사관원(司諫院: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서 정충신의 죄가 더욱 엄중하니 해서지방(황해도)으로 귀양지를 옮기도록 명한 훈령이 실려 있었다. 물어보나 마나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이시백이 다녀간 것이 불리하게 엮이고, 의원의 내방도 염탐하는 면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중 더욱 엄중한 것은 박황의 상소문에 정충신의 이름이 올라있다는 점이다. 남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조정 신료들은 옳다구나 하고 박황과 작당한 것으로 밀어붙여 정충신을 더 멀리 쫓아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정충신이 침통하게 앉아있는데 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님, 요즘 한양의 여론이 아버님께 중벌을 주도록 주장하는 무리들의 상소가 다투어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상감마마께옵서도 막을 수 없어 도리없이 명을 내렸다고 하옵니다. 상감마마께서 아버님을 도우려 해도 이와같은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충신은 왕이나 신료들이나 그 자가 그 자라라고 생각했다. 어느 면에선 줏대없이 신료들에 휘둘리는 왕이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왕은 똑똑하고 공정하고 볼 일이었다. 그는 그러나 아들에게 엄중히 말했다.

“너는 괘념치 말거라.”

세월이 하수상한 난리 속에서는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약일 수 있다.

“아버님께서 직언으로 국가 신료들의 심기를 거슬리니 괘씸죄가 부가되어 더 큰 사단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박황 어르신과 뜻을 같이 하니 장차 변이라도 일으킬 것인 양 모해하고 있나이다. 아버님께서 더욱 경계하셔야 합니다.”

빙은 아버지를 염려하고 있었다.

“아비 걱정은 말고 너나 잘해. 너 역시 무장이니 무엇보다 상하간에 결속하여라. 군관으로서 아랫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것이 결속의 근간이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 소속 아랫것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것 명심하여라. 그들이 명문가 자제들보다 더 소중한 존재들이니라.”

“알겠습니다.”

사대부 자제들과 교유가 충분하지 못해도 아랫것들을 소중히 여기면 그것만으로도 군관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 그 자체로 군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치가 있다. 공명과 출세와 영광만이 세상의 미덕은 아닌 것이다.

정충신이 두문불출하자 어떻게 소식을 알았던지 당진군수 이영인이 사람을 보내왔다.

“장군 나리를 모시고 오시랍니다.”

“물골에 묻힌 사람이 또 쫓겨가게 되었는데 왜 부른단 말이냐.”

“하여간에 모시랍니다.”

정충신은 관아 하인의 안내로 당진군의 동헌으로 나갔다.

“귀양지가 바뀌었다지요?”

당진군수 이영인은 당진의 유지라는 성시방의 집으로 그를 안내했다. 성시방은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어서 드넓은 뜰을 화초로 꾸며놓고 있었다. 화단이 흡사 꽃 왕국 같았다. 나라의 안위가 재앙과 재화(災禍) 속에 있어도 꽃밭 가운데서 기생을 데려다 놓고 가야금을 뜯으며 즐기는 풍류가 또다른 세계로 비쳐졌다.

“봄철이라 모판도 준비해야 하고, 꽃도 옮겨심어야 하고, 나무 접목도 해야 하니 종들을 몇십명 더 데려와야 하는데, 군수 영감이 좀 협조해주시오.”

성 생원이 말하자 이영인에 앞서 정충신이 소리쳤다.

“종이 한갓 당신네들 풍류를 즐기라고 태어난 줄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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