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순 제주양씨(濟州梁氏) 학포공파 학포종가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조선 제일 충효 가문
제주양씨 시조 탐라국왕 양을나
기묘명현 양팽손 종가 열어
의로운 인물 키운 학포당
실록에 기록된 가문의 일화
매죽도 그림에 남긴 가훈

전남 화순 도곡면을 흐르는 지석천 중류에는 달아실 마을이 있다. 성리학의 절의정신을 목숨처럼 지켜온 조선제일 충효가문이며 탐라국 왕족 집안인 제주양씨 집성촌 마을이다. 거친 역사의 파도에도 의연했던 탐라국처럼 당파싸움과 국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18세대를 이어온 학포공파 종가를 찾아 의로운 가문의 내력을 알아본다.
 

학포당과 은행나무. 1521년 양팽손이 기묘명현 등 문인들과 교유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학포당을 세웠고, 그의 차남 양응정이 뒤를 이으면서 심은 은행나무가 5백년 수령의 우람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4천년 이어온 제주양씨

가문의 역사가 4천300여년에 이르는 가문이 제주양씨다. 제주도 삼성혈에서 기원전 2337년 탄생한 양고부 세 신인(神人) 중 '양을나'가 제주 양씨(梁氏)의 시조다. 682년 중시조 양순이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져 이때부터 제주를 양씨의 본고장으로 했다.

◇양팽손 학포당 사림선비 정신

중시조 양순의 22세손 양이하(?~?)가 화순 도곡에 종가터를 잡고 아들 양팽손(1488~1545)이 가문을 일으켜 학포공파 종가를 열었다. 양팽손은 송순(1493~1583)과 함께 송흠선생에게 공부하고 정암 조광조(1482~1520)와 함께 과거에 합격했다. 현량과에 발탁되어 사간원 정언 벼슬을 하다가 기묘사화(1519)로 삭탈관직 당해 낙향한 후 능주에 유배된 조광조와 경론을 탐구하며 최산두 등 기묘명현 등과 교유했다. 왕도정치의 이상국가를 꿈꾸던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후손 없음)가 사약을 받자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 지내고 문인 제자들과 추모했던 초가가 훗날 죽수서원이 된다. 그는 쌍봉리에 학포당(포은 정몽주의 학문정신을 배우는 집)을 열어 연구와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안견의 화풍을 잇는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보존), 산수화8폭병풍(동경박물관 보유)등과 학포유집(2권)을 남겼으며 죽수서원에 조광조와 함께 배향된다.

◇기억해야 할 호남의병 숨은 주역들

양팽손의 3남 양응정(1519~1581)은 세 번이나 파직된 후 복직하며 공조참판·대사성을 맡았고 낙향해 정철·백광훈·최경장·최경회·신립·박광전 등의 제자를 길렀다. 을묘왜변 때 백세례·양달사·백광훈 의병장, 임진왜란 때 양산숙(1561~1593)·양산룡 형제, 제자인 최경회·신립·박광전·안중묵·정운·김덕우·최경운·최경장·최경창 등이 의병 등으로 나선다. 사돈 고경명 부자, 사위 김광운·김두남, 외가의 김인갑·김의갑, 아들 양산숙의 동문 조헌·김덕령 등 의병들이 양응정과 깊은 연을 맺고 죽기를 각오한 의로운 길을 함께 했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양응정의 아들 양산룡이 임진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일 장군을 추대했고 군량을 조달했다. 양산숙은 선조에게 밀서를 바치고 돌아와 김천일 부대에 합류해 진주성을 사수했고 김천일·최경회·고종후와 함께 순절했다.

◇모자·형제·부부의 충효열

정유재란 때 양산룡이 양산축과 함께 모친 박씨부인을 모시고 적을 피해 배를 탔는데 갑자기 닥친 적선을 피할 수 없어 사건이 벌어졌다. 박씨는 “대부의 지어미로서 욕볼 수 없다”며 투신하자 건져냈으나 “뜻이 결정됐거늘 건져내 무엇하나”며 재투신했고, 효성 지극한 두 아들도 따라 몸을 던졌다. 양산룡의 처 유씨와 누이들(김광운·김두남의 처 양씨들), 은장도로 자결한 양산숙의 처 이씨 등이 어미 또는 지아비를 위해 죽었다. 한집안 9명이 한 자리에서 한결같은 충효·정열을 보인 것은 양응정 집안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한다.(양씨삼강문,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1호)

◇매화·대나무 닮은 인물 배출

11대손인 구한말 의병장 양한묵(1862~1919)은 3·1독립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투옥돼 옥중순국한 독립지사다. 양회일(?~1908)은 을사늑약(1905) 후 화순 쌍산의소(사적 제485호)에서 의병을 일으켜 능주 관아를 점거, 화순으로 진격하다 일본군에 패해 체포·유배되고 다시 거병하다가 투옥돼 옥사했다. 가문의 충절전통 계승을 위해 ‘매죽도’판화를 소장하고,‘눈속에서 봄을 알리는 매화처럼, 부러질 지언정 절개를 저버리지 않는 대나무처럼’ 살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학포당(전라남도기념물 제92호)과 학포선생 부조묘(화순향토유적 제7호)를 보존하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양팽손 산수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측 상단의 오언절구 율시는 다음과 같다.(이원복 저 ‘한국 미의 재발견’에서 인용)
家住淸江上 晴窓日日開 맑은 강가에서 사니 화창한 날엔 늘 창을 여네
護村林影? 聾世瀨聲催 마을을 감싼 숲 그림자, 흐르는 물소리가 세상사 귀먹게 해
客棹隨潮泊 漁船捲釣廻 應爲看山來 손님 태운 배는 조수 따라 멈추고, 멀리 배 위의 손님은 당연히 산 구경 온 사람들
江闊飛塵隔 灘暄俗語聾 강이 넓으니 나는 티끌 막히고 물소리 그치지 않으니 속세의 소리들이 묻힌다
漁舟莫來往 恐與世相通 고깃배여, 함부로 오락가락하지 마소. 세상과의 벽이 트일까 두려우이
學圃寫. 학포가 쓰다.
학포당.
기둥에 쓰인 주련 문구는 양팽손이 7세 때 지은 시이다.
天地爲吾量 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
日月爲吾明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되니
天地與日月 천지와 일월은
都是丈夫事 도시 장부의 일이라
양팽손 부조묘의 경장각
학포종가 안채
양팽손이 그린 매죽도 판각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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