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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9)

기사승인 2020.07.02  18: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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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9)

6부 5장 귀향

“무슨 시끄러운 일이 있었던가?”

정충신이 의아스러워서 물었다. 한때 아버지 윤(倫)의 묘 이장 때문에 집안간에 말이 있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목숨이 초개처럼 왔다갔다 하는 전장에서 부하들을 살피고, 전술과 전략을 짜느라 집안의 대소사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김대남이 전하는 말은 의외였다.

“아매도 정충신 자네가 압록강변 의주에서 이항복 문하에서 학문과 무술을 익힌 뒤 무과에 급제해 일선 지휘관으로 파견되어 갔을 때 쯤의 일이었을 것이시. 자네 춘부장께서 돌아가시고, 뒤이어 어머니도 작고하셨어. 연이어 상을 당해부렀제...”

“부모님상은 내가 평안도 북쪽 해안의 선사포 첨사로 복무할 때의 일이네. 스물한 살 적이었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1597년 9월22일), 한달도 안되어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지. 나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한참후에야 별세 소식을 들었네. 고향땅과 워낙에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인편이 늦게 당도한 것이지. 그때 몸을 빼 내려간다고 해도 이천 리가 넘는 고향에 당도하면 무덤에 풀이 자라날 지경이 되었을 것이야. 그런데 정유재란이 닥쳐서 나라가 엄중하던 시기고, 나는 불철주야 해안을 지켜야만 했지. 대신 진중에서 매일 미음만 먹고 상을 치른 것이었네.”

그로인해 정충신은 영양실조로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다. 눈에 석이 들었다고 했다. 극도의 영양실조는 눈부터 실명한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불효막심한 생각으로 끼니를 잊고 지냈다.

“효성이 지극했던 자네로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구만.”

그런 상황인데 부하들이 산에서 약초를 캐 달여먹이면서 갱신하게 되었다. 정충신은 몇년후 주청부사(奏請副使:임금의 명을 따라 외교사절직을 수행한 버금 사신)가 되어 장만 장군을 수행해 연경(燕京:베이징의 옛이름)을 다녀왔다. 그는 명의 동태와 후금의 침략 야욕을 살피고 조정에 대비책을 강구하는 첩서를 올렸다. 그 첩서에 따라 나라는 압록강변의 요충지에 석성(石城)을 쌓았고, 함흥 부성(府城)을 축성할 때는 정충신이 직접 현장에 투입되어 군사들과 백성들을 독려했다.

“자네 춘부장께서 돌아가시기 훨씬 전에 어느 스님이 자네를 보고 명당 자리를 말했던 것 기억나는가?”

“글세. 어떤 말인데...”

“스님이 마을로 탁발을 왔는디, 자네 집이 기울어져가는 오막살이 아니었는가. 그란디 자네가 쌀됫박을 수북하게 해서 공양을 했다는 것이제. 심청이의 공양미 못지 않았다는 것이제맹.”

정충신이 광주목사관 지인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 스님이 그의 집 마당으로 들어와 염불을 외웠다. 주섬주섬 외는 것이 아니라 복락이 가득 들어오도록 너무도 진지하게 염불을 해서 정충신이 광의 쌀독에서 바가지 가득 쌀을 퍼서 스님 바랑에 넣어주었다. 그랬더니 그가 토방에 앉더니 정충신을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어려운 집에서 이렇게 공양을 하니 예사롭지 않구먼. 총각의 사주관상이나 보아주고 가겠네. 아하, 보아하니 보통 상이 아니여. 나라에 큰 일꾼이 되겄어. 묘를 제대로 쓰면 정승 자리에 오를 상이로구먼.”

“묘를 제대로 쓰면 정승 자리에 오른다고요? 묘 자리가 그렇게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까?”

“좋은 데 쓰면 좋을 것 아닌가. 총각의 종중 산을 한번 가보세.”

정충신은 스님을 모시고 경렬공 정지 장군이 모셔져있는 종중산으로 갔다. 무등산이 가깝게 보이고, 주변 산세가 아늑해서 누가 보아도 명당이었다.

“앉으면 보이고, 서면 안보이는 곳을 찾아보시게. 그곳이 명당이네.”

그러나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 아니었다. 서야 보이고, 앉으면 안보이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런 명당이 어디 있습니까.”

“그렁깨 명당이제. 그만큼 찾기가 어렵단 말이시.”

결국 그런 땅을 찾지 못하고 스님은 돌아갔고, 정충신은 얼마후 집을 떠났다. 권율 장군의 장계를 들고 임금이 몽진한 의주로 가서 전달한 뒤 백사 이항복의 집에서 먹고 자며 무과 시험을 준비해 1등으로 급제했다. 그런데 사대부 자제에게 부당하게 장원을 빼앗기고 2등 합격으로 무인의 길을 걸었다.

“자네가 집을 떠난 후 큰 형님 반이랑 집안 식구들이 계속 명당을 찾아헤맸네. 춘부장이 명을 다하셨승개 묘터를 잡아야 하는디 기왕에 들은 말대로 명당을 찾아야 했단 말이시. 결국 찾들 못하고 유체를 가매장하고 명당을 찾으면 이장을 하기로 했던 것이여. 그때 누군가가 경렬공 묘 바로 밑에 명당 자리가 하나 있다는 것이여. 기막힌 묘자리라는 것이여.”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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