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33)

6부 6장 포도대장, 깃발 펄럭이며

포도대장 재임 불과 몇 달만에 지방병마절도사로 발령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긴 커녕 도적떼가 활개치지 못하도록 수도 치안을 확실히 잡고, 백성들을 삥뜯는 포교나 포졸을 모범적으로 뽄대를 보이고, 순라꾼들의 도성 순찰을 정상화하면서 우범지역과 마작하는 집, 아편꾼을 단속하면서 어수선한 민심을 잡았다. 그런데 외직으로 저 멀리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쫓아버린 것이다. 여기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사간원을 중심으로 한 관리들의 음해가 지속적으로 있었다. 명나라 사신에게 과도하게 재물을 바치는 그릇된 사대에 대해 정충신이 비판하고 나서자 관가에 이런 말이 나돌았다.

“대국에 대한 예의와 의리를 배신한 자는 역도다. 도성에서 쫓아내야 한다. 간자처럼 후금의 정세는 꿰면서 명에 대한 대처는 들이받는 것으로 일관하는 정충신은 역적이다. 근본없는 자일수록 흉계를 꾸미는 데 능하다. 주화파 일당을 모아 거사할 것이 우려되는 바, 미리 패대기를 쳐버려야 한다.”

그러자 다른 대감이 나섰다.

“그자가 도둑떼를 잡은 것은 다분히 의도가 있었소. 도둑들로부터 압수한 물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백성을 구휼한다고 모두 곡식으로 바꿔 분배했소. 그 재물이 누구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관대, 마치 자기 것인 양 선심을 썼단 말이오. 양반을 능멸한 것이오. 백성들로부터 인심 얻으면 떡이 나오나? 자리가 나오나. 이 나라 조정은 사대부가 끌어가는 것이지, 백성이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얼간이란 말이오. 사대부의 재산을 지 멋대로 분배하는 것이 가당치나 한가?”

“촌놈이 저만 깨끗한 척했소이다. 그런 자가 아녀자 따먹고, 부잣집 재물을 가로챘소. 그런 자를 포도대장 시켜주었더니 지 배창자 채우느라 날밤 새는 줄 모르고 있소.”

정충신이 주어진 환경에서나마 틀을 바꾸겠다는 욕심은 과욕이었다. 구세력의 음해와 모략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법 체계를 바꿔보겠다는 의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끝내 역공을 당한다. 그만 당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따르던 자들이 하나같이 잘리거나 좌천되었다. 바꿔보자고 나서지 않은 것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만큼 반동은 컸다. 최명길이 찾아왔다.

“다시 귀양가다시피 하니 안됐소. 백두산 눈밭에서 근무하던 정 공이 떠오릅니다. 그때 기개가 시퍼랬지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정충신이 젊었을 적,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있을 때, 북백 장만의 사위 최명길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구도나 구국의 념이 추상같았다. 그때 정충신이 나라를 근심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은 0.1할 밖에 안되는 양반 계급들이 백성을 수탈하고 착취하고, 5할의 백성을 노비로 부리니 발전이 안되지. 제도를 바꿔야 하오.”

“정 만호가 출신이 그래서 그런 거요? 천계(賤係) 출신은 언제나 이렇게 삐딱하다니까.”

“뭐라고 이놈아?”

정충신이 버럭 소리지르며 최명길의 멱살을 쥐어잡았다. 대대로 명문 집안에 장만의 사위까지 되었으니 세상을 보는 눈이 이렇게 기득권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배우고, 익힌 것을 가지고 세상 이치를 본다. 너는 공부를 했어도 헛것을 배웠구나. 배운 사람으로서 사람 구실 하지 못한다면 미물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모르고 세도를 부리던 놈들이 나라를 통째로 왜국의 아가리에 집어넣은 것이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다. 백성들은 왜국에게 저항하는데 관군은 도망을 가고, 어떤 자는 왜군 고스카에 노릇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 그자들이 지금까지 조선의 주류사회를 형성한 양반들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조선은 거대한 멸망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정 만호의 말이 맞소. 내가 세상을 잘못보고 살아온 것을 용서해주시오. 형으로 받들겠소.”

최명길은 정충신보다 열 살이 아래였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는 구세력 집단의 일원으로서 사고의 한계가 없지 않았지만, 그후 주어진 환경에서 개혁의 열망을 품고 살았다. 그것은 정충신과의 친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조산보 이후 삼십 년 동안 친교를 맺어왔다. 두 사람은 나라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외교의 다변화, 내부 변화가 단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길은 비주류의 길이었다. 구세력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자신들을 지탱하는 힘은 빛나는 예지력이었지만, 한결같이 견제를 받으니 따르던 인걸들도 지친 나머지 하나둘 떠나가고, 지금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634년 11월(음력), 진눈개비가 흩날리는 가운데 정충신은 길을 떠났다. 최명길이 빈 들판을 함께 말을 타고 걸으며 그를 전송했다.

“정 대장, 지금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정해 황제를 자처한다는데, 조선 내부에서는 국왕부터 중신들까지 오랑캐와 붙어보자는 척화론이 지배하고 있소. 압록강이 얼면 큰 화가 닥칠 것이 뻔한데, 이런 때 정 대장이 떠나니 걱정이오. 내가 심히 외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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