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전설따라 남도삼백리
▶꾀 많은 제자(3) 절호의 기회
그림/이지선(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그림/이지선(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어린 녀석이 넙죽 머리를 조아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스승님, 설마 제가 스승님을 도적놈을 만들려고 그러겠습니까? 제게 다 계략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 혼자 사시는 어려움을 면하고 장가 드실 수 있습니다.”

“뭐라! 이놈아! 난 이렇게 혼자 사는 게 좋다! 그것은 절대로 아니 된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스승님,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장가 드실 수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합니다!”

“에잇! 이 맹랑한 녀석! 내일부터 서당에 다시는 나오지 마라! 아무리 철없는 어린아이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다니!....... 어험!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놈!”

‘글줄이나 읽고 아이들에게 인륜도덕을 가르치며 살아가는 선비에게 그런 개망나니나 할 짓을 하라니? 내 이렇게 혼자 고달프게 살다 종국에는 굶어 죽더라도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이훈장은 철부지 어린 제자의 말에 노발대발 화가 나서 사납게 소리치다가 다시금 마음을 고요히 누그러뜨리고는 벌떡 일어나 어린 녀석을 따돌릴 양으로 서당 문을 열고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 어린 녀석이 급하게 일어나 이훈장 뒤를 따르며 말했다.

“스승님, 내일 새벽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절호의 기회라? 정말 저 어린 녀석이 단단히 무슨 계책이라도 세웠단 말인가?’ 어린 녀석이 자꾸 이훈장에게 다짐을 주는 것이었다.

이훈장은 어린 녀석이 자신의 신세를 아주 망쳐놓으려고 별스런 짓을 다 시킨다 싶어 기가 막혔으나 내심 그 여인에게 장가 들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할까하는 괴이한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슬그머니 불쑥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다. 아내를 여의고 홀로 고단하게 살아오면서 삶이 주는 이별의 고통을 톡톡히 실감하고 살아가는 이훈장이었다. 아내가 있었다면 오순도순 세상일 정담을 나눠가면서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기쁨을 나누고, 궂은일은 궂은일대로 함께 대처하며 살아가는 맛을 마음껏 누릴 것인데 모진 것이 병이라고 시집오고 얼마 아니 되어 서로 백년해로를 할 연분이 아니었던지 덜컥 병이 들어 몸이 아파 누워 버렸으니 좋은 약을 지어 먹이고 안달하며 병수발 하는 데만도 꼬박 두해가 걸렸던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 짝을 만나 건강하게 살다가 애 낳고 길러 시집장가 보내고 또 손자손녀도 보고 늙어 죽어 가는 것이 인생살이인데 이훈장에게는 그런 평탄한 길이 당최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보낸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정도 그러하려니와 외롭게 혼자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그 인생이란 것이 주는 고통을 삭이며 하루하루 감내하는 맛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밤새워 뜬눈으로 고민하다가 새벽녘이 되자 이훈장은 ‘세상사 일이란 게 다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하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린 녀석의 하는 말에 혹시나 하는 한 가닥 기대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느 결 자신도 모르게 굳은 결심을 하게 했고, 급기야 이훈장을 순간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최씨 부인이 산다는 그 마을로 향하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희뿌옇게 새벽안개가 스멀스멀 몰려오는 청량한 들길을 얼마간 걸어 최씨 부인이 사는 그 집 뒤로 돌아가 누가 볼 새라 두리번거리며 정말 도둑놈처럼 슬그머니 돌담 너머로 집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멀리 있는 샘으로 물이라도 길러 간 것일까? 아니면 어린 녀석이 어제 은밀히 말했던 것이 맞기라도 한 것일까? 집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이 훈장은 자꾸 콩닥거리는 가슴을 감싸 안고 주위를 살피면서 도둑고양이처럼 담을 넘어가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고 방안을 살펴보았다. 간밤에 잠을 잔 듯 보이는 이부자리는 그대로 방 아랫목에 펴져 있었는데 최씨 부인은 거기 없었다.

만약 최씨 부인이 방안에 자고 있었다면 아뿔싸! 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슬그머니 빠져나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냅다 줄행랑을 놓으면 그만이었는데 ‘방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어린 녀석의 무슨 꿍꿍이 계략이 들어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그리고 이제는 없는 용기가 이훈장의 가슴 한 복판에서 불길같이 용솟음쳐 올랐다. 그것은 최씨 부인에 대한 사랑하는 남녀 간이 나눈다는 그 뜨거운 연모의 정일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훈장의 얼굴은 순간 붉게 달아오르고 이성을 처음 대하는 첫사랑에 가슴 떨려하는 어린사내처럼 심장이 자신도 모르게 문득 사납게 물 방아질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으음! 여기까지 와서 내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혹, 그 어린 녀석 덕분에 내 고단한 홀아비 신세를 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과부 좋고! 홀아비 좋고! 이놈 인생사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겠지! 에라! 나도 모르겠다!’

마침내 어린 녀석의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결정하기에 이른 이훈장은 대담하게 최씨 부인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방 아랫목에 깔려있는 비단 이불 속으로 생쥐처럼 쏙 기어들어가 어린 녀석이 시키는 대로 거기 벌렁 드러누웠다. 보송보송한 이불속에 배인 젊은 여인의 비릿한 살 향내와 분 냄새가 순간 이 훈장의 코끝을 물큰 파고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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