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野說天下
<제2화> 명필 이삼만 (15)추사와의 만남
그림/이미애(단국대 예술대학 졸업)

그림/이미애(단국대 예술대학 졸업)

이국의 땅에 장사꾼으로 와서 그냥 버려질 물목기의 필체를 눈여겨 볼 줄 아는 마음, 그리고 그 쓰레기 종잇장과 같은 물목기의 글씨에 반해 300냥이라는 거금을 던질 줄 아는 마음, 정읍 산골까지 먼 길을 달려와 그 글씨 쓴 사람을 찾아 만나서 글씨 값을 지불하고 글씨를 받아 갈 줄 아는 그 중국인의 순정한 마음이 곧 한 시대의 필객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글씨를 볼 줄 알고, 그 글씨를 쓴 사람을 볼 줄 알고, 수고롭게 그 사람을 찾을 줄 알고, 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아닌 것은 아니다’ 말 할 줄 알았던 그 중국인은 참으로 내심 어떤 탁월한 경지를 더듬는 부러운 마음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수만의 눈이 있으나 보는 것은 돈이요, 칼이요, 권력이요, 탐욕이요, 출세요, 쾌락밖에 볼 줄 모르는 썩은 동태 눈깔들만 줄줄이 모여 사는 좁고 추저분한 그런 곳에서는 빛나는 보석이 길가에 깔려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개새끼에게 금목걸이를 걸어준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개새끼에게는 먹다버린 뼈다귀가 제격이요. 굶주린 늑대에게는 죽은 병아리가 제격이겠다. 사람으로 태어나 겨우 형체나 사람일뿐이고 또 재주 좋아 높은 자리에 올라 고상한 것 같으나 실상은 한손에 칼을 쥐고 한손에는 기름진 배창자를 두들기며 가난한 백성의 피비린내 나는 생육이나 도려 삼키는 데나 골몰하는 그런 한심한 인사들에게는 예인(藝人)은 사치요, 예술품은 허세며 종국에는 유치한 자기기만이자 천박하고 교만한 쾌락일 것이며 투기품목일 뿐일 게다.

당시 조선의 명필로 소문이 자자한 54세이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향 가는 길에 전라감영에 들려 열여섯 살이나 더 많은 70세의 이삼만을 불러 글씨를 시험해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때 추사는 이삼만의 글씨를 보고 서슴없이 말했다.

“흐흠! 역시 내 생각대로 조필삼십년(操筆三十年)에 부지자획(不知字劃)이로구나!(삼십년 붓을 잡았다지만 획도 하나 못 긋는다) 내 보니 노인은 겨우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 살만한 글씨로군!”

오만한 눈빛으로 이삼만의 글씨를 사정없이 하평(下評)해대는 추사를 쓱 바라보며 이삼만은 당당하게 큰소리로 일갈을 했다.

“저 자가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맛과 조선종이의 스미는 맛은 분명 잘 모르는 자가 아닌가!”

당시 권력을 누리던 문벌 양반들은 고급스런 털이 짧은 중국 붓과 종이를 수입해 썼는데 가난하게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이삼만은 그런 고급스런 수입 붓과 종이를 전연 쓰지 않고 오직 꾀꼬리 꽁지털이나 칡으로 만든 갈필(葛筆)에 앵무새 꽁지 털로 만든 부드러운 조선 붓과 종이를 사용했기에 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추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등을 돌려 길을 떠나갔다.

당대의 양반 문벌로 태어나 최고 교육을 받고 쉽게 이르지 못할 높은 벼슬에 오른 교만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추사의 눈에 어찌 삼전이나 파 뒤집어 먹고 흙 구렁 속에서 무지렁이처럼 살아가는 산골의 학벌 없고 문벌 없고 지위 없는 그런 하찮은 노인의 특이한 것이 눈에 보이기나 했겠는가!

자연 속에 살아오면서 하찮은 지위나 허명이나 권력 따위는 행여 꿈결에도 욕심내지 않고 하루하루 자신의 끝없는 정신 수양의 끝에서 조선 붓을 잡고 조선종이 위에 사리처럼 빚어가는 글씨의 멋과 오묘한 깊이를 권문세가의 알량한 지식 속에 과거 급제와 벼슬이라는 고관대작의 교만과 오만으로 치렁치렁 치장해 두르고 그 속에서 화려하게 뒹굴며 살아온 나이어린 추사가 감히 알아보고 문턱이나 넘었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따지고 보면 물목기의 글씨를 보고 이삼만의 글씨를 한눈에 알아본 그 옛날 중국인의 눈에도 형편없이 못 미치는 오만과 교만으로 가려진 눈을 추사는 가지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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