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野說天下
<제2화> 명필 이삼만 (16·끝) 명필창암이공(名筆蒼巖李公)

최고의 명필 이삼만의 ‘산광수색’
역동하는 독사의 형상이 돋보인다

그러기에 추사는 해남 대흥사에 가서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글씨를 보고 크게 호통을 쳤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게 원교인데 저런 게 글씨라고 걸어 놓았단 말인가! 당장 떼어내라!”

대흥사 스님들이 형조참판을 지낸 추사의 추상(秋霜)같은 호령에 못 이겨 글씨를 떼어내 창고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대신 추사가 쓴 대웅전(大雄殿) 글씨가 걸렸다.

생각해 보건데 반도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살아가면서 명, 청 그리고 심지어 왜구의 눈치까지 살펴야 했던 조선왕조시대와 일제식민지시대, 미군정, 6·25 그리고 군사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가슴도 마음도 좁쌀만큼 작아져버렸다. 아첨과 변절의 이력을 덕지덕지 달고 으름장을 놓고 앉아 ‘내가 최고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그 속물에 소인배 근성으로 제 측근만을 강아지처럼 배회하는 아첨꾼으로 작은 파당이나 지어 자기들만의 높은 성을 쌓고 교만하게 거들먹거린다. 결국에는 모든 개성 있는 다양한 생각과 사상, 문화를 말살하는 일에나 골몰하면서 모든 것을 독단적이고도 몰개성적인 획일화로 치장하기에 바쁜 인격 없고 실력 없는 지위와 허명과 권력만 가진 간사한 족속들이 예나 지금이나 도처에 허다한 실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 안에는 부정한 힘과 부패한 자본의 대결과 충돌 그리고 생명의 살해라는 극단의 비열하고 추악한 역사만이 존재한다.

훗날 추사 김정희가 8년 6개월이라는 제주도의 귀양살이가 풀려 64세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려 자신이 쓴 글씨를 한참동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전날에 원교의 글씨를 몰라보았구나! 내가 쓴 저 글씨를 떼어내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달게!”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을 강조하며 가슴속에 5천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던 추사는 고달픈 귀양살이의 과정에서 자신의 오만과 교만을 떨쳐낸 것일까?

추사는 한양으로 가는 그 길에 정읍의 이삼만의 집도 찾아보았다. 그러나 이삼만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추사는 이삼만의 제자를 만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李公三晩之墓)’라는 묘비명을 남겼다고 한다. 한겨울 추운날씨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던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의 혹독함을 겪고 나서야 ‘자기 잘난 줄만 알았지, 남이 잘난 줄은 전혀 알아보지 못하던’ 추사가 비로소 자신의 오만한 껍질을 깨고 밖으로 순한 눈이 되어 천하의 내밀한 경지를 어루만졌던 것이었을까?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 중국인의 특별한 혜안이 아니었던들 산골의 무명 필객 이삼만의 글씨와 이름은 영원히 이 땅에서 꽁꽁 묻혀버리고 말았지 않았겠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그때 그 바닥이나 지금 이 바닥이나 세상 살아가는 인간들의 작태는 하나 다를 것 없이 똑같거니 고요히 초야에 묻혀 살밖에 없는 버려진 사람의 쓸쓸한 마음 귀를 어찌 모르겠는가!

이렇게 한 소절 이야기가 보태졌다 사라지면 한 시절 폭염으로 달구어지던 대지도 식어나고 또 아름다운 단풍 물 드는 시절이 오는 것이었다. 거기 또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무명의 객들이 사랑방 구들장 아랫목에서 ‘제까짓 것이 다 뭐야!’ 저 추상같다는 임금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도란도란 시절 여무는 야문 소리를 곧잘 시작 해댔으니 밤 새워 북풍은 점점 칼날을 세워 불어와도 오두막집 사립문 앞 개울물은 그칠 새 없이 도란거리거니 세월 가는 소리에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또한 그칠 새 없는 것이렷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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