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성을 지키는 초병에게도 책임감이 있는가?

이재남 (광주양산초 교감)

악마의 성을 지키는 초병에게도 책임감이 있을까?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악마의 성을 지키고 있지만, 자기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초병에게는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맡은 역할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것은 사회생활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힘들다고 주저앉는 나약한 태도로는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상관이 누구든지, 묵묵히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덕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양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악마의 성을 지키는 초병의 책임감은 진정한 책임감이 아니라, 부도덕한 범죄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오히려 그러한 성실함과 책임감이 악마의 성을 유지하는 자양분을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나치학살의 아우슈비츠 교도소를 지키던 하인리히의 소장에게도 소장으로서 책임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책임감은 악마를 위한 것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악마를 위한 책임감 같은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의 모든 책임감은 선한 목적위에 있을때만 정당화 된다고 주장한다.

하루하루 매우 성실한 당신은 누구의 성을 지키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내가 오늘 하루를 이렇게 힘겹게 책임감있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악마나 천사와 같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살고, 직업에 대한 소명과 높은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악마의 편이라고 일갈했으며, 그 증거로 하인리히의 평범성을 제시했다. 이 악의 평범성은 소시민적 책임감속에서 자란다는 것이다.

종종 직업의식이 매우 투철하거나 자기조직에 헌신적인 사람들은 이 악의평범성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성적 사유는 내가지키고 있는 이 성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지만, 감성적 측면에서는 금방 소시민적 일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악의 평범성의 타겟이 되는 계층이나 정서는 저학력, 저소득, 집단주의, 민족주의,인종주의 같은 정서다. 영국의 브렉시티 과정에서 전통적인 노동당 지지층이 찬성하고 나선 것이나, 저학력 백인층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맥락이 그렇다.

이성은 계속 내가지키는 이 성곽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지만, 감성적으로 이 성문을 지키는 초병으로서의 책임감이 솟아난다. 가상의 적을 끊임없이 만들어서, 이성을 마비시키면서, 개인의 이익을 교묘하게 공익으로 포장하여 감성을 자극한 결과다. 범인들은 이성과 감성을 명쾌하게 구별할 능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필요도 없는것 같다. 근본적으로는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의 문제부터가 간단치 않다. 악이라는 것도 근본적이지도 않고,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일단 성문을 지키고 보는 것이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어느 검찰주의자의 일성은, 결과적으로 자기 조직에 충성하겠다는 말이 되었다.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 투철한 소명의식이다. 밥주는 사람이 누구든 그냥 내 집만 지키겠다는 개의 본성이다. 그래도 고민은 남는다. 성 주인의 실체는 늘 결과적으로 초병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이 있다. 그저 지켜보며 살다보면 그이의 정체성은 금방 파악이 되지만, 그 맥락에서 벗어나는 결단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악의 평범성에 대항하는 유일한 길은, 신이 빼앗지 않고 인간에게 남겨준 ‘사유’라는 선물을 활용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매사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 하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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