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5)술값
<제4화>기생 소백주 (35)술값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으으하하하하핫!”

김선비는 들었던 붓을 순간 사납게 멀리 허공으로 내팽개치며 미친놈같이 한바탕 크게 웃어재끼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글을 배울 까닭이 없었다. 글을 배운들 과거에 급제하여 오직 호의호식(好衣好食) 일신의 영달이나 추구하는데 써야하고, 백성들을 핍박하고 윽박질러 세금 거둬들이는 데나 써야하고, 임금에게 알랑거리는 데나 써야하고, 상전에게 아첨하고 뇌물 바치는 데나 써야하고, 또 자신처럼 벼슬자리를 흥정하는 데나 써야하는 것을, 더구나 이렇게 기생에게 한잔 술을 빌어먹을 때나 써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모름지기 선비가 글을 배웠으면 백성들을 위한 글을 써야하고, 임금의 실정을 바로잡는 글을 써야하고, 세상의 바른 도(道)와 정의를 세우는데 써야하거늘 이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천하의 웅변가 변론의 천재라 일컫는 유가(儒家)의 성현 맹자(孟子)는 양나라 혜왕이 ‘선생께서 우리나라에 오셨는데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천하의 인의(仁義)를 논하러 왔는데 네놈은 고작 이익을 말하느냐?’며 면전에서 비판했고, 조소(嘲笑)의 천재라 일컫는 도가(道家)의 성현 장자(莊子)는 양나라 혜왕이 부르자 입고 갈 옷이 없어 평소 입던 누더기 옷에 짚신을 신고 갔다.

양 혜왕이 장자의 그 거지 행색의 몰골을 보고 ‘선생께서는 항상 그렇게 굴러다니십니까?’라고 말하자 ‘이것은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나 성군현상(聖君賢相)을 만나지 못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라고 말하며 그것은 ‘네놈이 정치를 잘못하니 내가 이렇게 사는 것 아니겠냐!’고 기발한 비유로 면전에서 비판하지 않았는가!

천하의 권력을 거머쥔 왕 앞에서도 목숨을 생각지 않고 굽힘없이 할 말을 한데다가 왕이 내미는 재상(宰相)자리도 초개처럼 여기고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 그들 성현에 비하면 김선비 자신은 제 손으로 갖다 준 거액의 뇌물을 벼슬자리를 내주지 않으려거든 되돌려달라는 말 한마디도 이정승에게 하지 못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왕도 아닌 한갓 정승에게 말이다.

김선비는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잠시 대청마루에 저만치 내팽개쳐져서 까만 먹물 짓이겨진 붓을 바라보고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거리며 웃다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던 김선비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 그 붓을 다시 벼루로 가져가 단정히 먹물을 잔뜩 묻혀 쓰다듬었다.

“이 땅에 본시 생명 있는 것은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떠나 서로 평등하거늘 어찌 기생이 준 술이라 하여 그 대가(代價)가 없겠는가! 의당 내 먹은 술값은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퍼뜩 이런 생각이 뇌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가는 것을 느낀 김선비는 비로소 술기운이 곧바로 머리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바로잡고 단정히 정좌하고 앉아 붓 끝에 떠오르는 맑은 시심(詩心)을 송두리째 싣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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