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안골 밭은, 마을은 어떻게 되지?
형광석(목포과학대 교수·전남지역 인적자원개발위원회 선임위원)

어머니를 뵈러 고향 마을에 가서 가끔 산책한다. 넓지 않은 마을 앞 들판의 논은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하다. 차렷 자세로 선 군인의 모습이 겹친다. 그래도 초등생 시절 학교에 오가느라 밟았던 구불구불한 논두렁길도 머릿속 암호가 풀리면서 그 바둑판에 그려진다. 마을의 온갖 풍상을 함께 겪느라 그랬는지 튼실하지 못했던 느티나무가 섰던 자리도 어렴풋하다. 그 나무가 시야에서 사라진 지 너무도 오래됐다. 어머니가 일하시는 밭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의 모습이 점검 크게 보이자, 퍼뜩 생각이 스친다. 저 안골 밭은 어떻게 되지?

88세가 멀지 않은 어머니는 대대로 불러오는 ’안골 밭‘에서 철에 맞춰 옥수수, 깨, 들깨, 콩, 채소 등을 재배하신다. 자식들에게 나눠주며 기뻐하신다. 알음알음으로 연결된 분들에게 수확물을 팔아 용돈을 장만한다. 그 돈으로 손자들을 격려하곤 한다. 이는 아직은 경제활동의 주체라는 어머니의 인식, 즉 자부심과 자존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도로를 벗어나 천천히 자동차를 운전하여 마을 길로 들어가노라면, 이만치는 어떤 아저씨가, 저만치는 어느 아주머니가, 저기 더 먼 곳은 어느 할머니가 사셨지, 등등의 옛 정취가 떠오른다. 아저씨께서 돌아가시더니 그 집은 헐려 뒷집에 합쳐지고, 아주머니가 떠나시니 그 집은 옆집의 터로 들어갔고, 인적이 끊긴 지 오랜 할머니 집은 지붕마저 무너졌다. 어머니 집의 앞집에는 아주머니와 사별한 채 지내시던 아저씨가 사 오년 전에 돌아가시자 새 주인이 생겼다.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 집 대문은 주말에 열린다. 고향 마을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촘촘히 집들이 들어서 120여 호가 살던 마을 공동체였다. 50여년이 떠나간 지금, 집들은 듬성듬성하다. 빈집이 많다. 설사 그 집에 거저 살라고 해도 대대적으로 수리를 해야 하는 형편이다.

마을 공동체는 언제까지 지탱할까? 아마도 멀지 않은 시점이다. 지금 마을을 지키는, 아니 공동체 정신을 지키는 최후 전사처럼 보이는 어르신들의 연세가 팔십 대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다. 그 분들이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난 이후 고향 산천은 어떤 모습을 지을까?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도다.’라고 탄식할지 모르겠다. 마을을 살펴보니, 도회지에서 이사 온 집이 몇몇은 된다. 감사한 일이다. 보아하니, 그분들도 경제활동에서 은퇴했거나 조만간 은퇴를 앞둔 분들이다. 청년(만 18세 이상 만 39세 이하; 전남 청년 기본 조례)은 보이지 않는다. 중학생도, 초등생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갓난아이도 새댁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기를 기대하는 일은 이젠 꿈에 불과하겠다.

고향 마을의 규모와 엇비슷했던 다른 마을의 상황도 대동소이하다. 지나가다가 차에서 내려 보니, 역시 집이 듬성듬성하다. 인적도 많지 않다. 한편 올해 초등학교 입학생은 한 명이라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정말 귀한 초등생이다. 당연히(?) 고향마을에는 초등학교 입학생이 없다. 군내버스의 크기도 작아졌다.

농촌에 사람만 부족한 게 아니다. 주인의 손길을 받아본 지 오랜 묵정밭이 적지 않다고 해서 농지가 남아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속도로를 낸다, 4차선으로 확·포장한다,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택지를 조성한다, 등등의 명목으로 사라지는 농지를 수시로 만난다. 영산강의 나주평야로 불렸을 법한 나주시 남평, 산포, 금천에 걸친 너른 들판은 4차선 도로로 덮이다시피 했다. 그 들판에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가 자리 잡았다. 이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확인 가능한 농지축소의 상황이다.

농촌 촌락공동체의 존립기반인 농민도, 농지도 탄탄하지 않다. 혹시 벌써 내년인 2022년 6월 민선 8기를 목표로 하는 지도자는 전남의 촌락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미리 제시해야 한다. 시골이 사라지면 심금을 울리는 시인은 태어나기 쉽지 않다.

와불로 유명한 운주사로부터 약 8km 북방에 자리 잡은 마을(화순군 도암면 도장리)이 내 고향이다. 족히 500여 년 역사가 깃든 마을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