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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창녕조씨(昌寧曺氏) 판윤공파 정곡공후 조정국 종가 <56>

화순 창녕조씨(昌寧曺氏) 판윤공파 정곡공후 조정국 종가<56>
한류콘텐츠 보물창고 광주·전남 종가 재발견
대동세상 꿈꾸며 청렴 실천한 선비가문
태조 왕건 부마 조겸 중시조
조민수 아들 조린 판윤공파 열어
정곡공 조대중 당쟁 휘말려 옥사
가학 담은 문집 고문서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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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전경

화순천이 흐르는 전남 화순읍 감도리에는 용신의 후예로서 8대가 연이어 평장사를 지낸 명문가의 자부심으로 학문에 매진하면서 가학을 발전시키고 청백한 목민관들을 배출했던 선비가문이 있다. 화순에 세거하는 창녕조씨(昌寧曺氏) 판윤공파 정곡공후 조정국 종가를 찾아 때론 찬란했고 때론 비운의 고초를 겪어야 했던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동해신룡 후예 시조설화
창녕조씨는 신라 태사를 지낸 창성부원군 조계룡을 시조로 모신다. 조선씨족통보(윤창현 저)에 기술된 시조 설화는 용신의 후예로서 조씨 성을 갖게 된 사연을 담고 있다. 창녕현 이예향은 혼기가 다돼 복중에 병이 생겼는데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니 신기하게 병이 나았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태중 아이의 아버지는 동해신룡의 아들 옥결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고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달이 차서 626년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 준수하고 겨드랑이에 조(曺)자가 붉게 써져 있었다. 소문을 들은 왕이 확인하고 성을 ‘조’라 하고 이름을 ‘계룡’이라 하니 그가 창녕조씨의 시조다. 창녕조씨는 이런 시조설화를 새기며 고려-조선-현대에 이르는 48세대 동안 명문의 전통을 잇고 있다.

◇8대가 평장사인 고려 충신가문
5세 조흠(?~?)은 뛰어난 문장가로 대학사 봉정상경 삼중대광 아간시중을 지냈고, 그의 아들 조겸(?~?)이 고려 태조의 부마로서 덕공공주와 혼인했으며 태악서승을 지냈다. 그를 중시조로 8세 조연우, 9세 조한지, 10세 조지현, 11세 조사전, 12세 조정린, 13세 조중룡, 14세 조의문, 15세 조자기까지 8대가 연이어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했다.

26세 조민수(?~1390)는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무장으로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요동정벌군 좌군도통사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후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워 공신으로 창성부원군에 군봉됐다. 전제개혁과 우왕혈통 논쟁에서 반대론을 펴다가 목은 이색과 함께 파직된 후 창녕에 유배되고 생을 마감한 고려 충신이다.

그가 시중공파를 열었는데 그의 아들 조원과 조린(?~?)에 의해 총제공파, 판윤공파로 분파된다. 조린의 아들인 28세 조흡(?~1429)은 마천목과 함께 2차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태종을 왕위에 올린 익대좌명공신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순창 예천서원에 배향, 현재는 화순의 지곡서원에 배향됐다.

◇‘통유’ 조대중, 기축옥사 화입어
29세 조연(?~?)은 사헌부감찰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조온(?~?)은 자예원 사의를 역임하고 화순에 입향했다. 후릉참봉을 지낸 조세명(?~1570)의 네 아들이 모두 사마시에 합격해 청백한 선비학자로 알려져 ‘조씨의 4봉황’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조굉중(호는 낙호당, 벼슬은 홍산현감), 조경중(벽송재, 문집은 소영집), 조민중(학탄, 은거학자)과 그들의 동생 조대중(정곡)이 봉황들이다.

33세 조대중(1549~1590)은 류희춘 문하에서 공부하고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이황으로부터 유학에 정통한 ‘통유’(학문에 해박하고 실천력 있는 학자)라고 칭송받았으며, 문과급제 후 사헌부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한림원 박사, 전라도도사를 역임했다. 조대중은 억울한 누명으로 기축옥사(일명 정여립 모역사건)에 화를 입어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순신은 역모죄가 없으니 압수물에서 자신의 편지를 숨기지 않았으며 조대중의 운구가 정읍을 지날 때 현감으로서 노제를 지내 통곡했다. 대동세상을 위한 윤리를 주창하며 곧음을 실천했던 그의 경세사상과 도학정신은 호남사림과 후학들에게 계승되고 화순 지곡서원에서 추모하고 있다.

◇은둔해 학문하며 청백정신 계승
조수정(호는 농암), 조수헌(호는 칠원) 등 기축옥사로 화를 입은 조대중의 후손들은 은둔해 학문에 정진하며 가학을 전승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수성(1570~1644, 청강유집)이 창의한 의병군에 조위, 조혁, 조적 등이 참여했다. 조상진, 조희유(사헌부 장령) 등은 문과 급제로 가문을 빛냈다. 조대중, 조경진, 조선갑, 조희유, 조문환 등과 함양박씨(1846~1879, 조상한의 처)는 효자·효열부로 알려졌다. 조대중의 증손인 36세 조정국(1660~1699)이 화순 도동마을에 종가를 열었고 13대를 이어 청백한 선비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가훈은 덕이 있으면 사람이 모인다는 ‘유덕유린’이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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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각과 종가 정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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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서원 전경 / 조영식 종손 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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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정. 조영식 종손 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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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안채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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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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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10세 조기술 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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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가훈, 유덕유린(덕이 있으면 사람이 모인다) 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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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5일 조국현(전국유도회 청년회장)이 화순 갱무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종가 10세 차종손 조기술이 필사한 기미독립선언서 필사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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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선언문 필사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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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선언문 필사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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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선언문 필사본4

서정현 기자  ndpl@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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