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6>-장계(狀啓)

“백성을 개돼지 취급하니까 이 모양이지요.”

“개돼지?”

“그렇사옵니다. 거드름피우고 위세부리고, 뜬구름같은 이야기 속에 갇혀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요. 그들 자신조차도 헤매는데 백성이 따르겠습니까요.”

“그렇다면 그들의 길이 무엇이라고 보느냐.” “바르게 가야지요. 수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큰 일이 아닙니다. 군역에 자발적으로 나서고, 징병도 그들 자제부터 내보내야 합니다. 사대부가 먼저 숨고, 재산을 숨기고, 자제들을 빼돌리면 그런 조정을 누가 따르겠습니까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위아래 나뉨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제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 함께 일하고, 모두 함께 나누고, 모두 함께 단합하는 가운데 군주를 떠받드는 세상입니다요. 권위는 존경을 받는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요.”

권율은 소년의 말을 듣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백번 옳은 말을 왜 자신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는가. 왜 한번도 거스르지 못하고 정해진 길을 가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했던가.

“너 지금 몇 살이냐.”

“열일곱입니다요.”

“대단한 이팔청춘이로다. 군인이 되겠다고 했겠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쉽게 말하지 말기 바란다. 뜻은 깊을수록 깊게 담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너의 말을 진실로 듣지 않은 것이다.”

그는 거듭 명토박았다. 소년을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권율이 단안을 내렸다.

“장계가 적의 손에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되느니라. 목숨을 걸어야 하느니라. 꼼짝없이 잡혀서 넘어갈 적시면 입에 넣어 씹어먹어버려야 하느니라. 장계가 큰 두루마리 하나인데 먹을 수 있겠느냐.”

“걱정 마십시오. 삼켜먹기 전에 그들이 먼저 당할 테니까요.”

충신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그는 어서 떠나고 싶은 욕망부터 앞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허허, 호기가 전부는 아니다만, 용기는 가상하다. 내 너를 일찍 알아보았느니라.”

권율은 이윽고 행장을 꾸릴 것을 정충신에게 지시했다.

정충신은 밤을 꼬박 새워 광주목사 권율로부터 받은 장계를 필사했다. 만에 하나 분실되거나 빼앗길 요량이면 다시 확인하려고 만든 여벌이었다. 글씨 연습하는 것처럼 삐뚤빼뚤 쓰고, 때로는 자기만이 아는 낙서도 기입해 넣었다. 그만이 아는 암호문자처럼 꾸미니 얼핏 서당 문턱을 기웃거리는 엉터리 서생의 낙서장처럼 보였다.

그는 천자문을 여덟 살 적에 뗐고,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열두 살 적에 마쳤다. 소학(小學)과 십팔사략(十八史略)과 병서를 읽은 것이 열네 살 적의 일이고, 지금은 대학과 맹자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글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필사를 마치자 그는 원본 한지를 일정한 간격으로 잘랐다. 한 장 당 너댓 갈래씩 자르자 한 북더기가 되었다.

정충신은 볏짚을 방안으로 들여와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싹싹 꼬기 시작하면 머리끝가지 올라가는데 익숙한 솜씨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지 한 가닥씩을 볏짚에 넣어 꼬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단단히 꼬기 위해 한지를 넣은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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